아메드를 떠나 우붓으로 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우붓은 이제 딱히 뭘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 쉬러 가는 곳이고, 실망할 일 없는 곳이다.
아내가 가고 싶다는 곳들 들르는 게 목적이다.
조식을 먹고 숙박하는 동안 후불로 걸어놨던 것들을 정산했는데...
아내의 잔잔바리 주문이 모여, 1박 2만원 짜리 숙소 6일 묵는데 룸서비스가 10만원 가까이 나왔다. ㅋㅋ
1박 2만원 짜리 숙소에 군말 없이 묵어 주는 걸 감사해야 하는 건가 싶다.
친구 동생 사고난 오토바이 수리비는 7만원 가량 나왔다.
주인 아저씨가 수리비 싸다며 1시간 거리 암라푸라 Amlapura 까지 끌고 가서 고쳐 오셨다.
수리 내역 영수증 주시면서 깔끔하게 수리비만 받으셨다.
그랩이나 블루버드 택시로 갈까 했는데, 아메드 지역에서도 주민들 사설 택시 말고는 영업 못한단다.
발리는 교통편 가격 담합이 견고한 편이어서, 인니 타지역에 비해 세 배 가량 비싸다.
외국인들은 현지 물가 감각이 없어서 느낌이 잘 오지 않겠지만, 인니에 사는 사람들은 크게 실감한다.
자카르타에서 발리 1시간 반 비행기 값이나 발리 내 주요 도시에서 도시 택시비가 비슷하니 비싸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숙소에 얘기해서 택시를 예약했다.
아메드에서 우붓까지 60만 루피아, 친구 동생이 우붓에서 짱구까지 가는 것도 30만 루피아 추가 요금 내고 데려다 주기로 했다.
띠르따 강가 Tirta Gangga 부근 지나면서 풍경
우붓 거의 다다라 정체가 시작됐다. 팬데믹 이전으로 경기 회복이 되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겠다.
우붓 시내에 있는 숙소 앞에서는 느긋하게 있을 짬이 없을 거 같아 잠시 차에서 내려 친구 동생과 담배 한 대 피웠다.
남은 여행 잘 하길 바란다고 덕담하고 우붓까지 택시비 60만 루피아를 건내며, 짱구에 예약한 숙소까지 가서 30만 루피아 더해서 지불하면 될 거라고 했다.
전부 내줄까 마음 편치 않기도 하고, 예의 상이라도 고맙다는 말 할 법 한데 당연하다는듯 냉큼 받는 모습이 얄밉기도 하다.
어차피 나와 아내는 우붓까지 올 거였는데 그 참에 겸사겸사 같이 타고 온 거라 신세진 거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이 먹어도 막내는 막내다.
숙소 앞에 도착해서 나와 아내는 내리고, 친구 동생은 바로 떠났다.
이번엔 우붓 중심에 위치한 삽따 하우스 Sapta House 를 예약했다.
어디 다닐 계획이 없으니, 오토바이 렌탈도 하지 않고 걸어서 다니기 좋은 위치의 숙소라 선택했다.
sapta는 산스크리트어로 7이라는 뜻이다.
인니는 이슬람과 불교 이전에 힌두교 문화가 전파됐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 원 산스크리트어와 약간 다르다.
1 eka, 2 dwi, 3 tri, 4 catur, 5 panca, 6 sat, 7 sapta, 8 astha, 9 nawa, 10 dasa
인니어 중에 산스크리트 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이 많은데, 한국어로 따지면 순우리말과 한자어 비슷한 개념이다.
지금이야 인니 주류 종교가 이슬람이지만, 문화 근저에는 인도에서 유래한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사람들 성향도 인도와 상당히 비슷하다. (그래서 이슬람도 아랍 본토에 비해 상당히 변형된 편이다.)
제국주의 시절 서양인이 인니에 '인도인들의 섬'이라는 뜻인 인도네시아라는 명칭을 붙인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12시 좀 넘은 시간에 도착해서 아직 방 청소 중이었다.
짐만 맡기고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오기로 했다.
뿌스파스 와룽 Puspa's Warung
소박하고 실용적인 메뉴판이 마음에 든다.
아메드에 있다가 우붓에 오니 발리 특유의 진한 코코넛 오일과 끄미리 Kemiri (캔들넛) 향이 확연히 느껴진다.
예전엔 그냥 이국적인 향이구나 그리 민감하지 않았는데, 아내가 민감하다보니 나도 의식하게 됐다.
나시 고렝 맛 평균 이하지만, 볶음밥은 어지간하면 대강 먹을만 하다.
숙소 관련해서 한국인 리뷰가 많았는데, 평대로 아주 깨끗했다.
1박 30만 루피아 가격대 숙소 중 깨끗함의 레벨이 달랐다.
자동 칙칙이 방향제로 향기 관리까지 했다.
뷰는 그냥 가정집 뷰. 답답하진 않다.
이 위치, 이 가격, 이 컨디션에 전망까지 바라면 도둑놈이지.
마감도 엄청 신경써서 마무리 됐다. 이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 된 건 엄청 부잣집이나 고급 리조트에서나 봤다.
한국은 독한 겨울 날씨 때문에 건물에 틈이 있다는 건 추위의 고통과 난방비 낭비라는 뜻이지만, 인니는 열대 지방이다 보니 문틀, 창틀 이음새가 잘 안맞고 허술한 게 '보통'이다.
문지방도 없어서 문을 닫아도 하단이 붕 뜨는 게 '보통'이다.
원래 나무를 틈 없이 짜맞추는 게 수준 높은 기술이 필요하고, 수없이 여닫는 문 부위는 더욱 그렇다.
잘못하는 게 아니라 그게 '보통'이다 보니 딱 맞춰서 마무리 지으려면 기술자가 신경을 잔뜩 써서 만들어야 하고, 설치하는 인부도 대충 붙이지 않도록 계속 신경써줘야 한다. (인부 눈높이에서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납득을 못하니까 반발을 한다)
일반 가정집도 이 정도는 보통인 한국인이 보기엔 당연하고 흔하게 느껴지겠지만, 인니에서 이렇게 지으려면 보통 수고가 필요한 게 아니다.
매트리스도 supreme이라는 고급 브랜드다.
에어컨도 교체한지 얼마 안된 새것 같다.
대만족이다.
시원하고 깨끗한 에어컨 바람 쐬며 깔끔한 매트리스에 누워서 뒹굴뒹굴, 저녁은 뭐 먹을까 검색했다.
라이브 공연도 하는 타코바 어떠냐니 아주 좋댄다.
오후 5시 쯤, 이제 슬슬 나가려 하는데 뜬금없이 고기가 먹고 싶댄다. 아이이잇!
변덕이 아니다. 그냥 아까 타코 얘기한 거 잊은 거다.
뭐 우붓은 아내를 위해서 온 곳이니...
클라우드 나인 Cloud 9 이라는 한국 음식점이 평이 좋다니 거기로 가야겠다.
걸어서 갈 거리는 절대 아니다.
숙소 관리하는 직원에게 오토바이를 빌렸다. 원래는 안빌리려 했는디...
1일 렌탈 좋은 거 8만, 굉장히 좋은 거 15만 루피아.
6시에 나가서 저녁만 먹고 8시까지 다시 갖다 놓겠다, 딱 두 시간 빌리는데 하루 8만 짜리 5만에 해달라니 선뜻 그러라고 하면서, 그냥 15만 짜리 타고 갔다 오랜다.
왜 이렇게 친절하지? 감동이다.
클라우드 나인은 우붓 왕궁 기준 3km 떨어진 곳에 있다.
맨날 허름한 오토바이만 타고 다니다가 엄청 좋은 걸 타니까 묵직하고 힘이 좋아서 어색했다.
그래도 속도가 빠를수록 확연히 안정적이다.
근데 인니 도로 사정이 워낙 안좋아 오토바이를 고속으로 달릴 일도 없으니 필요성이 떨어진다. 다루기만 힘들다.
음식 다 맛있다.
채소, 김치 등 사이드 음식을 최소화 하고 추가 주문 당 계산 추가를 받아 가성비도 맞췄다.
상차림도 서양인이 생소하지 않도록 절충점을 잘 찾은 거 같다.
다만 제육볶음은 양배추 비율이 너무 많아서 양배추 볶음에 제육 조금 토핑한 수준이라 채소 싫어하는 난 실망이었다.
채소 좋아하고 건강한 음식 좋아하는 서양인들은 좋아라 하겠다.
메뉴판에는 밥 포함 아니라 써있어서 밥 따로 시켰더니, 밥 포함이라서 밥 세 그릇이 나온 참사가 있었다.
뭐 내가 잘못 봤던가, 한국인 서비스를 줬던가 했겠지.
삼겹살도 맛있었지만, 된장찌개를 한 숟갈 목으로 넘기니까 뭐가 뻥 뚫리는듯한 느낌이 크흐.
한식 한동안 안먹었다고 시름시름 앓고 그런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한식 먹으면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 있다.
특히 한국 '국물'.
고기야 어딜 가나 단짠이나 매운 맛 어떻게든 비슷한 걸로 충족이 되는데, 한국 국물 요리 특유의 그 맛과 느낌은 대체가 안된다.
직원에게 은밀하게 물어보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가게 뒤 창고에서 수갑과 채찍도 꺼내올 거 같은 분위기의 속옷 가게
오토바이 숙소에 반납하고 다시 산책을 나섰다.
우붓이 아무리 변했다고는 해도 밤이 되면 진가가 살아난다.
선선한 가을 같은 날씨에 향 냄새 섞인 밤공기를 맡으며 걷다 보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여기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쓰는 곳이다.
서양의 은퇴 연금 생활자가 많이 사는 이유가 있다.
터키스 코코넛 샾 (이제 튀르키예스라고 하나?)
어우 장사 잘 되네 여기.
투르크 아저씨가 막대기에 아이스크림 꽂아서 돌리고 줬다 뺐다 능욕하고 그러진 않았다.
주문하면 얌전히 퍼준다.
아주 진하고 맛있었다. 리뷰 좋을만 하다.
다만 한 스쿱에 3만 루피아로 싸진 않다.
원가 얼마 안할텐데 돈 갈쿠리로 쓸어 담겠다.
일반 편의점 진열대에 소주가 진열되어 있다니, 발리는 좋다.
발리 이외의 지역에서는 진열은 커녕 시중에 파는 곳도 없다.
수입해도 죄다 식당으로 들어가 시중가 두 배로 팔린다.
인니 로컬 업체가 자체 생산하는 소주.
저 브랜드 한류 식품들은 원조 한국 음식의 맛 포인트 따위는 대범하게 무시하고 현지화 시켜서, 한류의 트랜드와 멋을 강조한 마케팅으로 성공했다.
다시 말해 한국 사람 입맛에는 '이럴거면 그냥 인니 음식을 먹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괴한 맛의 제품들이 대부분이다.
이태리 사람들이 피자와 스파게티에 민감해하는 심정이 이해가 좀 간다. 그 사람들처럼 오버할 생각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