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뱀의 심장을 가진 허깨비] 8. 협정 파기

명랑쾌활 2024. 11. 27. 07:54

지사는 골칫덩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글로벌 업체와 연계했던 사업은 품질 기준을 확 낮춘 제품을 떠넘기듯 납품한 이후로 틀어졌고, 대금 문제로 위탁 생산 업체와 분쟁 중이었다.

신규 오더도 장담했던 것처럼 늘지 않았다. 케빈은 오더를 따와도 본사 생산이 대응을 제대로 못한 탓에 떨어져 나갔다고 했지만, 샘플 단계에서 통과를 못하고 틀어지는 일은 비일비재 하다.

새로운 매출을 일으켜 1년 내에 임대료, 관리비 지출을 자급하고 이익 구조로 돌아서겠다는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본사는 계속 자금 지원을 해야 했다. 

케빈은 새로 들여온 설비에 맞는 최소 10만 달러 단위의 큰 오더를 이제 곧 따오네 마네 하며 버텼다.

지사 직원들의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출근해도 할 일이 없어서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았고, 사기는 밑바닥이었다.

케빈은 무엇을 하는지 지사에 일주일에 한두 번 잠깐 출근했다가 나갔다. 직원들은 거의 방치 상태였다.

지사에 가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 재스민, 메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지사 돌아가는 얘기는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장이 요즘 케빈하고는 연락하고 있냐고 내게 물었다.

업무 제외하고는 따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장은 요즘 케빈과 통화가 통 안되서 무슨 일 있나 싶어 내게 물었다며, 지금 지사에 갈 건데 케빈에게 따로 연락할 필요 없다고 했다.

아마 사장도 케빈이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다른 루트로 들은 모양이다.

지사에 도착한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케빈은 없고, 직원들은 소재를 모르고, 케빈 자리의 서류철들은 대부분 먼지가 가득하고, 경비는 케빈이 이번 주에는 아직 출근한 적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케빈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는다며 내게 전화해 보라고 했다.

내 전화도 받지 않았고, 케빈의 운전기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장은 혹시 쓰러진 건 아니냐며, 케빈의 집에 가보라고 내게 지시했다.

집엔 아무도 없는지 초인조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케빈의 차량도 없었다. 전화는 여전히 받지 않는다. 사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다음 날, 사장은 어젯밤 케빈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쓰러져서 몸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응급실에 갔었다고 한다. 경황이 없어서 핸드폰은 집에 두고 갔고.

운전기사를 불러 왜 전화를 안받았냐고 물었다. 운전기사는 배터리가 다 떨어졌다고 대답했다.

 

내가 케빈 집에 찾아가고 자기 운전기사를 불러 물어본 게 케빈의 신경을 건드렸던 모양이다.

케빈은 자기 출근 뜸한 거 내가 사장에게 보고한 거냐며, 그렇게 자기를 쫓아내고 싶냐고 화를 냈다.

출근을 하지 않은 자기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쫓아내려고 일러바쳤냐고 따지는 게 황당했다.

널 쫓아내봐야, 영업직도 아닌 내가 마케팅 사무실인 지사를 어떻게 관리하냐고 했지만, 영업직 채용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한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네 추천으로 들어온 회사인데 네 오해 받아가며 아등바등 다닐 생각 없다, 내가 퇴사하면 네 자리 뺏을 생각 없다는 거 증명하는 거 아니냐, 무작정 나갈 순 없고 다른 직장 구하는대로 퇴사할테니 그만하라고 했다.

 

한 달 후, 뜬금없이 케빈이 자기도 사직할 계획이라고 내게 말했다.

"우리 중고 설비 중개해주고 오더 주려다 틀어졌던 로마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아랍 쪽 투자자 소개해 주더라고요. 뭐 그런 조그만 회사에서 아등바등 속썩냐고요. 저 인피니티 오더도 전부 땡겨올 수 있는 거 로마이도 알거든요. 부지 매입해서 공장 크게 짓고, 로마이 오더도 그리로 몰아주고 대신 마진 퍼센트로 떼어주고, 그런 얘기 진행 중이예요. 그런데 제가 지사 확장하고 벌려놓은 일들이 있는데 이대로 퇴사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 투자 제의가 사기가 아니라면 괜찮은 기회고, 저번에 응급실 갔던 일도 있으니 회사에는 건강 상 이유로 사직한다고 하면 무난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자금 들여서 설비 들여 놓은 건 책임져야 하니, 지금 진행하고 있다는 대형 오더는 꼭 마무리 지어야 할 거라고, 그러지 않고 나가 버리면 이제 업계에서 너 소문 진짜 안좋게 날 거라고 했다.

케빈은, 어차피 이제 한국 업체 상대도 안할 거라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사실은 그 오더는 이미 거의 확보된 거나 다름 없어요. 그거 영업한다고 출근도 못하고 쫓아다니고, 매일 밤마다 접대하다가 쓰러진 거예요. 언제 오픈하면 좋을지 시기만 재고 있어요."

 


내가 사직하겠다고 선언한 이후로, 케빈과 나는 일종의 정전 협정을 맺은 사이처럼 됐다. 케빈은 지사, 나는 본사 업무에 집중하고 서로 터치하지 않는 것으로 선을 그었다. 물론 사적으로는 만나지 않았다.

속으로는 너무 불편했지만 겉으로는 웃으며 담배 같이 피울 정도 분위기는 됐다. 둘이 있을 때 호칭도 형님으로 돌아갔다. 가끔 재스민 험담을 툭툭 던지는 집요함은 여전했지만, 나는 전에 약속한대로 얼마 안있어 재스민도 퇴사할테니 조금만 이해하라고 응수하고 넘어갔다.

얼마 후 11월 초, 재스민은 케빈에게 사직서를 냈다. 

재스민이 사직서를 제출하자마자 케빈은 내게 전화해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물었다.

연말 전에 자진 퇴사 시키겠다고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냐고 했다.

"아니, 형님. 이렇게 퇴사하면 어떻게 해요? 제가 인피니티 쪽에 재스민 자리 만든다고 제임스에게 얘기 다 해놨는데. 재스민도 그쪽 가서 월급 섭섭찮게 받고, 지사 오더 챙겨주고, 그림 다 짜놨는데요."

나는, 네가 나나 재스민에게 그런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고, 재스민 일 못한다는 얘기만 계속 하지 않았냐, 재스민도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자진 퇴사해야 해서 속이 말이 아니다, 퇴사 설득하느라 나도 힘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너 엿 먹이자고 가족 부양하는 애 회사 그만 두게 할 정도로 정신나간 놈 아니니까, 행여나 그런 오해는 하지도 말라고 했다.

케빈은 연말까지 재스민 퇴사시킬테니 시간을 달라고 했던 내 말이 지킬 생각 없이 주워섬긴 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재스민은 사직서 제출할 때 케빈의 벙찐 얼굴이 너무 고소했다고 내게 말하며 통쾌하게 웃었다.

 

 

이 즈음 해서 나는 외부 컨설팅과 계약하여 회사 인력 감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매출 확대를 통한 성장이 회사 경영 방침이었기 때문에 미뤄왔지만, 본사의 이익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인력 감축을 하면 당연히 직원 반발이 있을 것이고, 한국인 직원도 2명이나 있을 필요도 없어진다. 어차피 퇴사하기로 마음 먹은 내가 악역을 맡고 나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케빈도 더 이상 신규 오더를 따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력 감축으로 인한 생산 문제도 없었다.

 

케빈은 지사를 독립적으로 운영할수 있도록 지사에 적합한 오더 개발에 치중하기 때문에 당분간 본사 쪽으로는 신규 오더가 없을 것이라 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케빈은 오더가 있어도 본사에 넘기지 않고 쥐고 있었다. 메이가 새로 개척한 거래처 오더들도 케빈의 파일에 차곡차곡 저장되고 있었다. 메이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내게 사실을 전했다. 메이로서는 자기 실적이 묻히게 되는 꼴이었다.

회사를 새로 설립할 준비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케빈은 여전히 지사에 거의 출근하지 않았다. 어쩌다 출근하더라도 퇴근 한 시간 전에 와서 회의한다고 퇴근 시간을 한두 시간 넘겨 가면서 직원들을 붙잡았다.

난 그런 사실을 함구했다. 불가침 협정을 깨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괜히 들쑤셨다가 케빈이 면피하겠다고 자기가 쥐고 있는 오더 중 조건도 까다롭고 가격도 안좋은 오더를 본사에 넘기는 상황이 벌어질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인원 감축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차라리 그런 오더는 없는 편이 나았다.

 

정전 협정을 깬 건 케빈이었다.

캐빈은 외부 컨설팅이 회사에 손실을 끼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고문에게 직통으로 보고했다.

외부 컨설팅에 회사의 불용 자재(생산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자재) 매각 권리가 넘어가는 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외부 컨설팅과 일을 진행하는 사람은 나다. 내가 외부 컨설팅과 짜고 매각 권리를 넘기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 없다.

깜짝 놀란 고문은 즉시 나를 호출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컨설팅 비용을 불용 자재로 대체 지불한다는 거였고, 계약서에도 분명히 명시한 사항이었다.

계약서 내용을 일일이 짚어가며 고문에게 설명했다. 고문은 그래도 찝찝하니, 회사가 자체적으로 매각해서 대금으로 지불하라고 지시했다.

 

굳이 고문에게 직보할만큼 급박한 일도 아니었다. 내게 먼저 확인했으면 될 일이었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회사 그만두겠다는 내게, 케빈이 왜 굳이 비수를 꽂으려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 두겠다는 내 말도 믿을 수 없어서 직접 숨통을 끊으려 한 걸 수도 있다.

자신이 나보다 먼저 나가게 되면, 자신이 꾸며왔던 일들을 내가 폭로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를 회사와 안좋게 갈라서게 한 후, 자신이 벌인 일들을 내게 뒤집어 씌우려고 그랬을 수도 있다.

내가 실체를 엿본 케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타인을 믿지 않고,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대로 나간다면 오명을 뒤집어 쓸 게 뻔했다. 하지만, 케빈과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것도 싫었다. 싸우면 이기든 지든 회사 취직 도와준 동생 쫓아낸 배은망덕한 인간 소리 듣기 딱 좋은 꼴이었다.
내 고민을 날려준 건 직원들의 파업이었다. 법무 컨설팅이 직원들의 해고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파업이 터졌다. 파업은 2일 만에 마무리 됐지만, 회사의 손실은 컸다.
애초에 인원 감축을 진행하면서 자리를 걸겠다고 공언했었다. 컨설팅이 잘못했어도 그런 컨설팅과 계약을 진행한 건 나다.

나는 사장에게, 직원 파업 수습과 컨설팅 계약을 마무리하는대로 책임지고 퇴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사장도 내 사직 의사를 받아 들였다.

마침 고문은 한국에 있었고, 며칠 후 복귀할 예정이었다. 고문에게 사태를 보고해야 하는 사장은 뭔가 중대한 조치를 취해야 그나마 면이 설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대로 끝났다면 내가 퇴사하는 걸로 끝났을 거다. 이대로 끝났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