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 총무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와 가장 오래 교류해온, 가장 신뢰하는 현지인이다.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는데, 내가 다니는 회사에 오더를 연결하고 싶다고 했다.
영업은 내 소관이 아니었고, 총무는 내 개인적 인연이다. 오해 받을 조금의 빌미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일단 사장에게 사실대로 보고했고, 전 직장 총무에게 케빈을 소개했다.
둘이 있는 자리에서 비즈니스로만 상대하고, 내 친분 때문에 양보할 필요 없다고 했다.
그 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전 직장 총무가 가져온 오더는 재활용 원료를 섞어서 만드는 신규 제품이었다. 재활용 원료는 공장에서 폐기물 처리하고 뒤로 풀리기 때문에 수급이 들쑥날쑥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취급한 적 없었다.
케빈은 오더 규모가 매우 커질 수 있다며 진행을 건의했고, 재활용 원료 수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빈은 재활용 원료 공급처를 소개했다. 재활용 자재는 세무 신고를 하지 않는 현금 거래다. 케빈은 회사에서 현금을 받아 갔고, 원료가 도착했다.
첫 오더는 30만 개였다. 초도 생산이라 불량율이 높을테니 테스트 오더만 소량으로 받자고 했지만 케빈은 밀어 붙였다.
"그 사람(전 직장 총무) 잡은 데 엄청 커요. 최소 월 100만 개는 받아야 한다는 거 사정사정 해서 이번 달에는 30만 개만 받고 다음 달에 70만 개 받자고 한 거예요. 다다음달 초가 르바란인데, 이거 제대로 쳐내면 회사에서도 성과 보너스 안줄 수 없을 거예요."
케빈은 그 달 매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30만 개 오더로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영업은 매출 목표 달성했다지만, 생산 현장은 폭탄이 터졌다.
초도 생산이라 생산 속도가 늦고 불량이 많았다. 직원을 추가 채용하고 야근 특근해서 30만 개를 겨우 맞췄다.
후속 오더 70만 개는 르바란 연휴 전까지 절대 맞출 수 없었다. 40만 개로 낮춰 겨우 맞췄다.
르바란 휴가 때, 나만 한국에 다녀오게 됐다.
원래 케빈이 르바란 연휴가 며칠 전에 귀국했다가 연휴 중간에 복귀를 하고, 나는 연휴 중 귀국해서 연휴 끝나고 며칠 후에 복귀하는 것으로 스케줄을 짰다. 르바란 연휴에 딱 맞춘 항공편은 최성수기라 가격이 두 배 차이라 회사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케빈은 부인이 임신 초기여서 한국 방문을 포기했고, 나만 한국에 다녀오게 되었다.
르바란 기간이 끝나 회사는 업무를 개시한지 이틀 후, 아직 한국에 있는 내게 케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업무 개시했다고 회식을 했는데, 나에 관한 안좋은 이야기를 들어서 빨리 알리려고 연락했다고 했다.
"회식 자리에서 고문님이 그러더라고요. 지사 손떼고 본사로 출근하라고 지시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사 나가냐고요. 이렇게 지시 안듣고 계속 자기 맘대로 할 거면,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고요."
새로 들인 설비에 물린 오더가 날라간 이후로, 난 지사에 관해 거의 손을 떼고 있었다. 설비 세팅이 지지부진하게 밀리고 있어서 그 이슈 관련해서만 1, 2주에 한 번 방문하는 게 전부였고, 그마저도 르바란 이후로는 아예 손 털고 케빈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케빈과도 그렇게 얘길 끝낸 상황이었다.
이미 손 때기로 한 거 말씀 안드렸냐고 하니, 케빈이 말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뭘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정확하게 말은 안했지만 해고까지 생각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형님 복귀하시자마자 바로 면담하셔야 할 거 같아요."
복귀해서 회사 출근하자마자, 사장과 고문에게 본사 관리에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엄중한 경고가 있을까 각오했는데 사장과 고문은 온건했다. 그렇잖아도 이제 그래야 하지 않나 말하려던 참인데, 먼저 하겠다고 그러니 참 좋다는 반응이었다. 케빈의 말과는 매우 달랐다.
그래도 방심할 순 없었다. 없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 사실이라면, 그냥 좋게 대하지만 속은 다를 수도 있었다.
그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도 사장과 고문의 기분을 최대한 맞췄다. 혹시 지시를 어기는 것처럼 비춰졌다면 오해라는 둥, 설비 세팅 마무리 때문에 부득이 지사에 가끔 갔던 거라는 둥, 르바란 이후로는 아예 손 떼려고 휴가 전에 이미 케빈에게 인수인계도 마쳤다는 둥, 혹시 사장과 고문의 속에 남은 부정적 감정이 있으면 털어내려 아부신공을 100% 쏟아 부었다.
다행히 통했는지, 사장과 고문은 기대가 매우 크다며 화기애애하게 회식을 끝냈다.
사장과 고문이 먼저 출발하는 것을 배웅하고, 나와 케빈, 생산 총괄은 출발하기 전 담배를 같이 피웠다. 내가 무사히 넘겨서 기뻐할 줄 알았던 케빈의 표정은 의외로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살아남으려고 오랜만에 아부 능력 100% 개방했다며 농담 섞어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케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요, 살아남으려면 뭐든 해야죠. 저도 앞으로는 나이 대우 같은 거 안하고, 우리 회사 살리는데 필요한 지시라면 뭐든지 할테니 두 분 모두 내가 지시하면 무조건 따라 주세요."
차장은 케빈보다 한 살 어리다. 나이 운운 하는 건 나를 겨냥하고 한 말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원하는대로 지사에서 완전히 손 뗐는데, 왜 계속 내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건가.
싸한 분위기를 남기고 케빈은 먼저 떠났다.
생산 총괄에게,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있었던 회식 자리에서 나랑 지사에 관련된 얘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이런 종류의 화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도 삼가해왔지만, 이번엔 꼭 확인해야 했다.
생산 총괄은 나와 케빈의 미묘한 분위기를 알고 있었는지, '사장과 고문이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라고만 하고 말을 아꼈다.
케빈과 나의 관계는 파탄이 난 거나 다름 없었다.
그 이후로 서로 업무 상 필요한 연락만 했다. 사적인 연락이나 만남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사에도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본사 지사 간 서로 보낼 샘플이 있으면 내가 출퇴근길에 들러 전하곤 했는데, 그 마저도 지사 경비실에 맡기고 안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케빈도 본사로는 주간회의를 하는 월요일 말고는 거의 오지 않았다.
주간 회의 끝나고 같이 담배를 피울 때면 별 의미도 없는 대화만 나눴다. 그러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재스민이나 메이가 일을 못한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특히 재스민에 대해서는 적개심까지 엿보였다.
재스민은 내 여자친구였고, 내 추천으로 채용된 메이도 나와 각별한 사이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서 둘이 친했다. 가끔 둘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지사의 소식을 들었다. 케빈의 강압적 태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고, 캐빈이 회사에 있을 때는 직원들 아무도 웃지 않는다고 했다. 재스민과는 지시를 제대로 따랐네 아니네 하는 문제로 몇 번 더 부딪혔고, 그 때마다 재스민은 메모한 다이어리를 내밀며 받아쳤다. 이후로는 같은 사무실에 있는데도 업무 지시를 이메일로 하거나, 메이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재스민에게서 연락이 왔다. 케빈이 자기한테 인피니티라는 업체 대표와 저녁 먹는 자리에 같이 참석하라고 하는데, 업무 지시라고 봐야 하냐고 물었다. 그딴 건 업무 지시도 아니고, 지시라 해도 매우 부당한 지시이니 따를 필요 없다고 했다.
인피니티는 외국계 글로벌 기업으로 당시 막 인니에 지사를 세팅하고 있었고, 지사장은 제임스라는 한국인이었다.
케빈이 언젠가, '인니 온지 얼마 안돼서 이것저것 알려주고 여기저기 데려가고 하면서 영업 밑밥 깔고 있다. 여기만 잡으면 지사 세 배로 확장하고도 남을 오더 터진다. 제임스가 인니 밤문화 맛보더니 신세계라도 본듯 아주 환장한다.'고 했었다.
제임스는 인니어는 못해서 현지인과 영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케빈은 외국계 학교 출신으로 영국식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재스민을 제임스와 붙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어느 선까지' 붙일 생각인가다. 선을 지킨다면 영업 방법으로서 허용 범위다. 남자친구로서 매우 불쾌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차라리 다른 회사였다면 모를까, 케빈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데 내가 먼저 나서서 뭐라고 해봐야 나만 실없는 놈이 된다.
며칠 후, 주간 회의가 끝나고 케빈이 심각한 얼굴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부장님, 재스민 더이상은 힘들겠어요. 통제가 전혀 안되네요. 제가 일개 부하 직원 때문에 참아가며 일하는 것도 좀 아닌 거 같고요, 아무래도 내보내야 할 거 같은데 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나는, 부서장 생각이 그렇다면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채용한 직원인데 그렇게 급작스럽게 자르는 건 내 마음이 많이 안좋다, 너도 에이프릴이 자기가 데려온 직원이라 본사 지사 옮겨줘가며 챙겨주고 있지 않느냐, 라고 했다.
그리고, 올해 말 이전에 자진 퇴사하게끔 할테니 그때까지 시간을 달라 했다. (연말까지 3개월 반이 남은 시점이었다.)
전 총무가 가져왔던 총 70만 개 짜리 오더가 결제 문제가 터졌다.
수금되는대로 지불하기로 했던 대금이 찔끔 찔끔 들어오다가, 총 대금의 10% 정도까지 입금된 이후로 끊긴 것이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상황 전체를 다시 파악하는 중, 후속 30만 개 예정이었던 오더 문제도 불거졌다. 30만 개 생산을 위해 구매한 재활용 원료가, 이미 대금을 지불했는데도 도착하지 않은 사실이 유야무야 가라앉아 있다가 떠오른 것이다.
우선 경리 문서를 뒤져 해당 재활용 원료 대금 결제 영수증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경리는 당시 케빈에게 영수증을 받아서 입력했는데, 며칠 후 케빈이 업무에 필요하다며 도로 가져가서 아직 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케빈은 원료 공급처가 다른 소리를 해서 증거로 쓰려고 가져갔었다며, 다시 돌려 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30만 개 발주도 취소됐고, 회사에 둘 곳도 없어서 원료 공급처에 홀딩해둔 거라며, 그쪽과 조율해서 원료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케빈은 70만 개 대금 결제 관련해서는 마치 남일 얘기하는듯한 태도였다.
회의가 끝난 후, 케빈은 나를 따로 불렀다.
"재활용 원료 문젠데요, 좀 곤란하게 됐어요. 대금 지불한 영수증을 어디다 뒀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부장님도 아시다시피 그쪽 업계가 거칠고 지저분하잖아요. 원료도 못받고, 돈 돌려받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어쩌면 좋죠?"
정 방법 없으면 경위서 써서 올리는 게 절차라고 했다.
케빈은 경위서에 변제하겠다고 써야 하냐고 물었다.
그런 내용은 굳이 명시하지 말고 회사의 처분에 따른다고만 쓰면, 변제를 하라고 하든, 월급에서 까든, 잘 봐주면 손실 처리하고 상각으로 떨구든 사장이 결정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70만 개 오더는 어쩔 거냐고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보고르 전역 시장에 깔리는 건데, 그 쪽 연결까지 다 해주고 전 빠졌거든요."
모른다고 하면 끝이냐, 결제까지 확인하는 게 영업 일 아니냐고 따졌다.
"제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그래요. 부장님이 그 사람 잘 아니까 한 번 알아봐 주세요."
오해 받고 싶지 않아서 둘 연결하고 신경 끊었는데, 다시 나와의 관계를 끌어 붙이는 케빈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전 직장 총무를 직접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전 직장 총무의 가까운 지인이 OO 시장에 그 제품 공급하는 사람인데, 물건 괜찮고 단가 맞으면 매입하겠다고 진행한 일이었다. 지인은 10만 개 매입할 수 있겠다 해서 주문했는데, 케빈이 다른 시장에도 물건 팔 수 있게 도와준다며 30만 개 주문하라고 했다. 내 소개라 믿었던 전 직장 총무는 자신을 도와주는 거라 생각하고 그 말에 따랐다.
케빈은 전 직장 총무를 통해 시장 지인으로부터 동종 업계인 인근 다른 시장들 공급자의 연락처를 받아, 20만 개의 제품을 뿌렸다. 케빈은 전 직장 총무에게 다시 40만개를 주문하라고 해서 역시 다른 시장들에 뿌렸다. 후불 조건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존 공급자들은 납품 즉시 현금 결제가 철칙이다. 돈이 없으면 물건도 없다. 단돈 100원에도 진흙탕에 구르는 걸 마다않는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후불로 물건을 넘긴다면, 언제 대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70만 개 대금 중 그나마 결제가 된 일부가 바로 전 직장 총무가 애초에 주문하려고 했던 10만 개의 대금이었다. 나머지는 전 직장 총무도 방법이 없었다.
후불은 회수가 어렵다는 사실은 나도 뻔히 알고 있는데, 영업직인 케빈이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도 밀어 붙였다는 뜻이다. 자기가 떼어 먹는 것도 아니고, 고작 월 목표 실적과 르바란 보너스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피가 식을 정도로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업무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둘에게 서로 비즈니스로 상대하라고 이미 말했다. 회수가 어려운 오더라는 걸 뻔히 알고 추진한 케빈도 잘못이 있지만 증거가 없었다. 받으란다고 받은 전 직장 총무의 잘못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도 잘못은 없지만, 도의적 책임은 느꼈다. 전 직장 총무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고 외면할 수 없었다.
전직장 총무에게 이미 뿌려진 제품을 가능한대로 무조건 최대한 빨리 회수하라고 했다.
주간 회의에서 사장에게 건의해서, 케빈에게 회수된 제품을 매각 처리하도록 했다.
나머지 미결제금은 전 직장 총무가 회사에 와서 변제 각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일련의 과정 중에서 케빈의 태도는 기가 찰 정도로 건성건성이었다. 회수된 물건을 매각하는데, 품질이 너무 안좋아서 헐값에 매각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 품질이 안좋다는 제품은 회사가 넘긴 거다.
케빈이 회수 제품 매각 대금을 계산해서 내게 넘긴 변제할 채무 금액 자료도 엉망이었다. 송장 자료와 비교 검토했는데 채무로 잡아야 항목이 누락된 것도 있고, 이미 결제한 금액이 누락되거나 중복 차감한 부분도 있었다.
수정하다 지쳐, 결국 처음부터 새로 계산해서 집계해야 했다.
케빈은 자료를 넘겼으니 자기 일은 끝났다는듯, 70만 개 오더 사건에서 방관자 입장을 취했다.
선금을 지불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재활용 원료 건도 슬쩍 묻혀가는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