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를 오픈할 수 있었던 명분이었던 글로벌 업체로의 시험 납품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위탁 생산 업체의 생산 결과물 중 품질 기준을 통과할 만한 제품의 수량이 너무 부족했다. 초도 생산임을 감안해서 목표 수량의 3배를 생산했음에도 그랬다.
추가 생산은 할 수는 없었다. 납품 기한이 촉박한데다 위탁 업체 측도 이미 부담이 컸다.
케빈은 해결책으로 이미 탈락한 제품들을 품질 기준을 낮춰 재검사해서 물량을 채워 넣는 방법을 택했다.
한달 간 누적된 탈락 제품을 1주일 내에 전량 재검사하는 작업이었다. 가뜩이나 연말 휴가까지 겹쳐 검사원 3분의 1만 특근에 동의했다. 나까지 달라 붙어야 했다.
12월31일에 케빈과 나, 단 둘이서 회사에 남아 철야 작업까지 했지만, 수량을 맞출 수 없었다.
나는 며칠간 본사로 출근했다. 신년을 맞아 본사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내가 없는 동안 케빈은 품질 기준을 더 낮춰 재검사를 했고, 원청 품질 검사에 통과하지 못할 게 확실한 물량까지 밀어 넣어서 결국 납품을 끝냈다.
그 즈음부터 케빈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퇴근 후 회사 밖에서 저녁을 먹으며 개인적인 얘기도 나눴었는데, 한 달에 한 번도 안될 정도로 뜸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납품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함께하지 않고 본사로 출근한 게 섭섭해서 그런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2개월 후, 본사 생산 총괄을 맡을 한국인 직원을 채용했다. 내가 지사 지원에 보다 치중하도록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더 나아지기 위해 했던 결정이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이 시기부터 캐빈은 내가 지사를 장악하고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지사의 내 자리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케빈이 잔뜩 화난 얼굴로 와서 대뜸 말했다.
"형님, 지사 직원들이 제 지시는 무시하고 형님 말만 들어요. 문제 심각한데요."
뭣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다.
"지금 셈플 가지고 업체 가야 하는데, '아침'에 그 샘플 작업 먼저 하라고 지시했거든요. 방금 전에 내려가 보니까 아직도 하고 있더라고요. 그거 한 시간이면 충분한 작업이거든요."
시계를 보니 12시다.
자기 지시 제대로 안따랐다는 게, 어떻게 하면 내 말만 듣기 때문이라고 귀결될 수 있는지 논리 전개가 궁금했지만 일단 현장으로 가봤다.
현장 분위기가 싸하다. 직원들 말로는 작업 중에 케빈이 와서 급히 보내야 할 제품 작업을 지시해서, 하고 있던 작업 마무리 하고 바로 지시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케빈이 다시 내려와서 아직도 안끝났냐며 화를 내고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케빈이 작업을 지시한 시간을 물어보니, 11시 좀 안돼서였다고 한다.
한 시간 '쯤' 걸릴 작업을 지시하고서, 한 시간 후에 가서 아직 안됐다고 불같이 화를 낸 거다. 그럼 직원들이 기존에 하던 작업들 내팽개치고 우루루 달라붙었어야 했나. 그랬어도 아직 못끝냈을 수도 있다.
아침에 지시했다는 말도 억지스럽다. 한국 사람도 11시는 오전이라고 하지 아침이라고 하지 않고, 인니어로도 11시는 아침이 아니다. 그냥 짜증을 내기 위해 과장했다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직원들이 내 말만 듣는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정상적이지 않았다.
다른 날, 이번엔 재스민을 문제 삼았다. (케빈은 재스민과 내가 사귀는 걸 알고 있었다.)
"형님, 제가 형님 걱정돼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요즘 재스민 관련해서 안좋은 말이 많아요. 지사 직원들 함부로 대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고 그런대요. 제 지시도 무시하고 자기 지시 따르라고 했대요. 형님 빽 믿고 그러는 거라고 뒷말 나오는 모양이예요. 사장님이나 고문님 아시면 형님 많이 곤란하실텐데, 뭔가 조치를 좀 취해야 할 거 같아요."
기가 막혔다.
"직원들이 니 말 안듣고 재스민 말을 듣는다고? 내 빽 믿고? 니가 나보다도 직급이 높은데? 아니, 직원들이 뭐 잘못하면 현장 다 뒤집고 소리 지르면서 애들 죽일듯 화내는 니 말을 거역하고 재스민 말을 따른다고? ...야, 넌 그게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뇨, 형님. 애들 사이에 그런 얘기 돈다고, 걱정돼서 말씀 드리는 거잖아요. 전 형님처럼 논리적으로 말하는 거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재스민이 꼭 애들한테 그렇게 말했다는 게 아니라, 애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안좋다고요."
도대체 그런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냐고 물었더니, 위시모가 그랬다고 한다.
위시모는 위탁 업체와 협업을 시작하면서 채용한 직원이었다. 케빈이 자기가 아는 똘똘한 사람이 있는데, 나이가 좀 있고 관련 경력도 없지만 강단있고 믿을만 하다며 추천했다. 주 5일 근무제인 위탁 업체에 파견 나가 근무하고, 주 6일 근무제인 우리 회사엔 토요일에 출근해서 주간 보고를 하는 식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1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잠깐 왔다 가는 직원이 재스민이 회사에서 그러는 걸 어떻게 아느냐, 다른 직원들에게도 확인은 해본 거냐고 물었다.
"다른 직원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그러진 않았어요.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런데 위시모가 그 얘기 하기 전에, 제 운전기사도 저한테 그런 비슷한 얘기 몇 번 한 적 있어요."
케빈 운전기사는 케빈 부인의 매형이다. 위시모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타겟은 또 재스민이다. 남편 주변의 여직원들을 배제시키려는 케빈 부인의 집념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부서장이라면, 최소한 다른 직원들에게 사실 관계를 확인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닌가. 두 사람의 말만 사실로 받아들여 재스민을 비난하는 얘기를 내게 하는 케빈의 태도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자신을 배재하고 지사를 장악하려 한다고 생각하던 피해의식이 부인의 모함과 결합해서, 내가 여자친구인 재스민을 통해 지사를 장악하고 있다는 시나리오로 발전한 것 같았다.
나는 직원들과 면담을 해보고, 사실이라면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훗날 위시모가 케빈 부인의 친척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퇴근 후 따로 메이를 불러 물었다. 메이는 의외의 일을 알려줬다.
며칠 전, 케빈과 재스민이 한 판 붙는 일이 있었다. 케빈은 왜 지시대로 하지 않았냐고 화를 냈고, 재스민은 다이어리에 메모해뒀던 케빈의 지시사항을 제시하며 그렇게 지시하지 않았다고 맞선 것이다.
문제는 그날 퇴근 시간 다다랐을 즈음, 케빈이 재스민만 먼저 퇴근하라 지시하고 사무실 직원들을 불러모았다고 한다. 메이의 말에 의하면, 요즘 일하면서 힘든 점은 없냐면서 '혹시 재스민과 일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냐'고 물었다고 한다.
다음 날부터 직원들은 재스민을 서먹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재스민과 친한 메이도 분위기 때문에 사무실에서는 재스민과 말을 나누지 않았다. 둘이 있을 때 재스민에게 미안하다 했고, 재스민은 괜찮다고 했다.
재스민은 이런 일들을 내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케빈의 비정상적인 행태는 점점 심해졌다.
어느 날인가는 케빈의 사무실에서 돌연 괴성과 함께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실 직원들은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나는 바로 케빈에게 가봤다.
본사가 잘못 대처하는 바람에 케빈의 큰 오더 중 하나가 틀어졌고, 전화로 그 사실을 전해들은 케빈이 분노를 참지 못해 수화기로 데스크를 수 차례 내리친 거였다.
직원들은 케빈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큰 사달이라도 날 거 같아, 지사에 있는 시간을 좀 더 늘렸다.
그런데 일은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점차 지사 쪽으로 비중을 옮겨 가고, 본사는 새로 충원한 생산 총괄과 사장이 관리하는 쪽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나더러 지사는 케빈에게 맡기고 본사에 집중하라는 정반대의 지시가 고문으로부터 떨어졌다.
지사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고, 사장은 회사 체질 개선을 하기엔 역량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회사 실소유주는 고문이다.)
케빈은, "저도 지사 관리하려면 형님 필요하다고 고문님께 말씀드렸는데, 뜻이 완강하더라고요."라고 했다.
오너 지시이니 따라야 했지만, 케빈의 변화 때문에 지사 내부 관리가 우려됐다.
고문과 면담을 통해, 새로 들여올 중고 설비 세팅을 마무리할 때가지만 1주일 중 하루는 지사에 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내가 지사에서 빠지는 대신, 사장은 케빈을 보조할 한국인 신입 직원을 충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고문이 그어놓은 처우 기준이 열악해서 적합한 인재를 고용하기 어려웠다.
고문의 지인이 운영하는 인력 업체로부터 후보자를 받았지만, 역량이 너무 떨어졌다. 연수생 동기들 중 마지막까지 채용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인의 청탁을 받은 고문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결국 그 후보자가 신입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케빈이 그 신입을 자기 부하직원으로 받기 싫어한 건 당연한 일이다.
다시 한 달이 지나, 케빈이 인사 이동 계획이 또 변경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일전에 고문님 지사 오셨을 때 그러시던데요. 본사 생산 총괄이 지사로 오고, 형님이 본사 생산 총괄까지 전부 맡고, 신입은 본사 영업 관리 시킨다고요."
무경력 신입이 본사 영업 관리를 맡는다고? 이건 또 뭔 개소린가 싶었다.
사장에게 확인했다. 사장은 그 비슷한 소리도 들어본적 없다며, 도대체 누가 그런 얘기를 했냐고 오히려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케빈이 작전 쓰는 것 같았다. 신입 받기 싫었던 케빈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인사 이동 계획에 그럴듯한 이유들을 붙여 지사에 방문한 고문에게 설명했고, 고문이 검토해보자고 대답한 걸 승인한 것처럼 몰아가 공식화 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본래 계획과 달리, 내가 본사 근무하는 것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도 케빈의 야료였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케빈의 됨됨이가 매우 실망스러웠다.
지사에 들여올 중고 설비 세팅까지 마치면 지사 업무는 완전히 손을 떼기로 마음 먹었다.
지사에 들여올 중고 설비는 신규 제품 분야를 개척하자는 케빈의 제안을 회사가 승인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원래 설비를 운영하던 회사가 자금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각한다는 거 잡았어요. 급매 처리 빨리만 해주면 기계에 물린 오더도 밀어주기로 된 거예요."
사장과 고문은 기대가 컸다. 진행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선금 50%도 바로 지급하고, 설비가 지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력 승압 공사가 늘어져서 가동 시기가 늦어져 버렸다. 케빈은 잔뜩 화가 나서 내게 말했다.
"설비 이동하고 세팅하는 거까지 스케줄 잡아서 그 동안 오더는 다른 업체에 임시로 맡기기로 한 거예요. 근데 틀어지면 어떻게 해요? 임시 오더 받아준 업체도 정식으로 오더 넣던지 아니면 더 안받아준데요."
"이 오더 컨트롤 하는 사람이 로마이라는 사람인데, 사이즈가 커요. 우리 준다는 오더는 그 사람이 컨트롤하는 오더 중 10%도 안돼요. 저 전 회사 다닐 때 친해지려고 엄청 공들였어요. 중고 설비도 이 사람이 소개해준 건데, 이 사람 사이즈에는 자잘해서 원래 자기 따까리 던져 줄 거 저라고 신경 써준 거예요. 고작 이런 자잘한 오더 기계 세팅도 제대로 못해서 약속 못지키는 회사랑은 거래하고 싶지 않다네요. 체면도 상했고."
"하아... 모르겠어요. 일단 비싼 데 데려가서 싹싹 빌어봐야죠. 돈도 찔러줘야 할텐데 일, 이십만원 줬다가는 코웃음 치면서 저 용돈하려고 되돌려 줄 걸요?"
케빈은 사장으로부터 2천만 루피아를 현금으로 받아 갔다.
전력 승압 공사 완료 예정일은 빠르면 7일, 늦으면 14일이었다.
인니에서 공사는 절대로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건 인니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숱하게 겪은 일이다. 공기업이 연관되었을 적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케빈에게 20일의 여유를 받아야 하며, 못해도 14일은 받아야 한다고 했다.
케빈은 접대로 일단 로마이와 잘 풀었다며 일정을 미뤘다. 늦춘 일정은 7일이었다.
하지만 전력 승압은 14일 만에 완료되어, 일정을 맞추지 못하게 됐다.
"로마이의 오더는 취소됐어요. 두 번이나 약속 못지켰으면 뭐 할 말 없죠. 가서 빌지도 못해요."
대놓고 나를 질책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느샌가 로마이의 오더가 틀어진 건 다 내 잘못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전력 승압 완료 후 1주일이 지나도록 설비 세팅이 제대로 안되고, 고장난 부분 대체할 부품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