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인니의 관료주의] 자동차세 납부

명랑쾌활 2021. 2. 25. 11:34

공무원이 국민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는 인식을 이른바 관료주의라고 하지요.

한국도 약 30년 전까지만 해도, 권한을 쥔 공무원이 턱 치켜 세우고 일반 국민을 깔보고 그랬었습니다.

뭐 '국민을 개돼지'라고 생각하는 공무원들이 아직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대놓고 그러면 큰일 나는 세상이 왔습니다.

 

인니는 아닙니다.

지금도 관료주의가 쩔어 넘치는 나라지요. ㅋㅋ

인니 관공서에 방문할 때는 반바지나 슬리퍼 차림 출입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암묵적인 룰이 아니라, 정말로 공식 규정입니다.

백성이 국가 기관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입니다만, 인니 국민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이다 보니, 10년을 살아도 당최 익숙해지기 어렵습니다.

 

최근 자동차세를 납부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납부하려면 자동차 등록증, 외국인 등록증, 경찰서 거주 신고증을 내랍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합니다.

자동차세를 내야 하니 자동차 등록증이 있어야 할테고, 신분증 역시 요구할 수 있고, 경찰 관련 업무니까 경찰서 거주 신고증 역시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소지 실거주 증명서'를 요구하는 건 황당하더군요.

거주지 주소는 외국인 등록증에 이미 명시되어 있고, 원칙적으로 실거주지를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자동차를 등록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등록된 자동차의 세금을 납부하겠다는데, 도대체 내가 주소지에 실제로 사는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왜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 웃기는 건, 내국인에게는 그런 서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뭐 어쩌겠어요, 외국인은 약자인데요.

인니어로 도미실리 DOMISILI 라고 하는 '주소지 실거주 증명서'는 반장, 또는 통장에게서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껏 10여 차례 발급했었는데, 보통은 무료로 끊어 주거나 종이 값, 프린트 비용조로 1~2천원 정도 받는 경우도 두어 번 있었습니다.

소정의 수수료를 받아도 된다는 지침이 있긴 하거든요.

그런데, 운 없게도 현재 살고 있는 집 관할 반장은 고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취업 허가 증명서 사본과 임대 계약 당사자 주민증을 두 배 크기로 늘린 사본을 요구하더군요.

실거주 증명과 내 취업 허가 여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_=

더 가관인 건, 서류들을 공문서 발급을 위한 자료이니 반드시 반투명 빨간색 플라스틱 파일 홀더에 넣어 제출하라네요.

인니 관공서에서 어떤 서류를 발급 받으려면, 발급에 필요한 서류들을 지정된 봉투나 서류철에 담아서 제출하라는 규칙이 있습니다. (https://choon666.tistory.com/142)

빨간색이라 빨간 봉투 Amplop Merah 라고 하는 그 지정 봉투는 보통 관공서 건물 옆에 붙은 가게에서 팝니다. 일종의 봉투 장사지요.

우리 대단하신 반장 나으리는 그런 관공서 규정을 흉내내어 빨간색 파일 홀더에 담아오라 요구하신 겁니다.

'나는 관공서와 똑같은 절차로 공무를 처리하는 (준)공무원이야'라는 권위주의 의식이 발현된 거겠지요.

 

 

반장 나으리에게 실거주 증명서를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들

다 준비했다고 문자를 보내니, 저녁에 손님들이 와서 바쁘니 다음날 아침에 오라는 답신이 옵니다.

그리고, 그날 밤 11시 50분에 문자가 날라옵니다.

외국인 서류 발급은 비용이 10만 루피아(=약 8천원)랩니다.

ㅋㅋㅋ 아 이런 씨발 주민을 위해 밤 늦게까지 일하는 훌륭하신 반장 새끼 나으리가 있나.

 

한국 같으면 불합리한 비용 요구라며 난리가 나겠죠?

인니에서는 돈을 요구해도 불법이 아닙니다.

'기초 자치단체의 공무원이 공무 처리를 위해 소정의 민원 처리비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거든요.

통반장은 '준공무원'이고요. (관청에서 통반장이 발급해주는 서류를 요구하기 때문에 준공무원 맞습니다.)

인니는 넓은 국토, 부족한 교통 인프라, 뿌리 깊은 지방 토호라는 3박자 덕분에 진즉부터 지방 자치가 기본적인 행정 방침입니다.

중앙정부로부터의 예산 지원도 턱없이 부족한데, 그마저도 부정부패 때문에 중간에서 하도 빼먹어서 일선 관청에 도달하는 예산은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공무에 필요한 예산은 지방 관청이 '알아서' 조달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인니는 '마을길'을 보수하는 비용은 마을에서 알아서 합니다.

마을 촌장이 자비를 보태든, 모금을 하든, 동네에 있는 기업들(특히 외국 기업)에게서 삥을 뜯든 알아서 조달한 돈으로 보수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네덜란드 식민 통치 300여년 간, 식민 총독부는 각 지방 토호에게 감투를 씌워 수탈 자원 수량을 할당하고, 할당량만 채운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해먹으라는 방식으로 통치했습니다.

정치 구조의 상당 부분을 네덜란드에서 차용했을테니, 지방 자치단체의 예산 자체 조달 역시 네덜란드 식민 통치 방식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날 아침에 찾아 갔습니다.

대단하신 반장 나으리는 출근하셨고, 부인이 대신 있었습니다.

돈을 내밀며 "코로나 시국이라 어려운데, 10만 루피아는 너무 부담스럽다. 다른 곳 살 때는 무료로 발급해주고 그랬다."라고 넌즈시 찔렀습니다.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여기 규정이 그렇다."라고 합니다. (지가 정한 규정입니다.)

외국인이라 자주 발급 받을 거 같은데, 그럼 그 때마다 10만 루피아를 내야 하냐고 하니, 이건 그냥 '주민 등록비'라 처음만 받고 이후로는 무료로 발급해 준댑니다.

그리고, 외국인은 10만 루피아, 다세대 주택 (원룸 임대) 입주자는 5만 루피아, 내국인 일반 주택 거주자는 등록비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네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이거 완전 개소리 같아도 경찰이나 관청에 신고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발급된 실거주 증명서에 명시된 반장 이름 뒤에는 SH라고 떡하니 박혀 있습니다.

Sarjana Hukum 법학사, 그러니까 법대 졸업한 그냥 학사라는 뜻입니다.

참나, 지랄도 가지가지입니다. 석박사도 아니고, 학사가 뭐 그리 자랑인지... ㅋㅋ

 

 

하다못해 동네 통반장까지도 이따위일 정도로 인니의 관료주의는 뿌리가 깊습니다.

교통 질서 의식과 함께, 인니의 관료주의는 인니 경제 수준이 아무리 높아져도 앞으로 30년 이내에는 개선 불가능해 보입니다.

행정 구조 기반 자체가 불명확한 비용 요구 관행을 전제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