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Flores Indonesia] 11/18. Wolobobo 전망대

명랑쾌활 2019. 10. 2. 10:03

선선하면서도 따가운 햇빛, 한국의 늦가을 아침이 연상되는 날씨다.

열대지방 고산지대의 아침은 그 차이가 더 극단적이다.


아침 7시 쯤, 숙소 안이 조용하다.

아마 투숙객은 나와 일행 한 팀 밖에 없는 모양이다.


숙소가 바자와 시내 입구 도로변에 있어서 한밤 중에도 심심찮게 차나 오토바이가 지나다닌다.

가뜩이나 플로레스 지역은 소음이 심한 오토바이가 많은 편이라 시끄러울까 싶었는데, 숙소 안쪽의 가장 좋은 방이어서 그런지 그럭저럭 조용하게 푹 잤다.

덕분에 컨디션도 회복된 느낌이다.

어제 아락 마신 것도 도움이 됐을 거다.


메뉴는 나시고렝과 빵 뿐이지만, 양도 실하고 정성이 느껴졌다.


수제 빵과 수제 잼, 그리고 무려 치즈가 같이 나온다. (인니는 유제품이 비싸다)

문제는 빵이 좀 흐물흐물 하고 맛이 없었다는 거.

정성이 느껴진다고 해서, 반드시 맛이 좋다는 건 아니다.

뭐 어쩌면 원래 그렇게 만드는 빵일 수도 있겠다.

밥도 이런 저런 종류가 있는데, 빵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건 없겠지.


산간 지역이라 그런지 수박이 좀 덜 달았다.

역시 산간 지역이라 그런지 디저트로 파인애플이 나왔다.

흔히 파인애플 하면 열대지방이 연상되기 때문에 인니 어딜 가든 흔히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아열대 식물이라 인니에서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서늘한 산간 지역에서 재배된다.

그래서 인니 산간 지역의 관광지들은 거의 어김없이 파인애플과 딸기를 특산물로 판다.


뜨거운 물과 타먹는 각종 음료 (커피와 차는 따로 나옴), 시리얼과 우유, 직접 갈아 만든 딸기 쥬스가 따로 비치되어 있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소박하지만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뭔가 고급져 보이는 소금과


후추가 테이블마다 비치되어 있다.

이쯤 되면 인색한 게 아니라 불필요한 낭비를 줄였을 뿐이고, 신경 쓸 부분은 유럽 눈높이로 확실하게 신경 썼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하루종일 타고 다닐 오토바이

유럽 사람 취향에 맞춰 유러피안 스타일의 오토바이인 스쿠피 Scoopy 를 대여해주나 보다.


안내문과는 달리 기름이 반 정도 채워져 있었다.


출발하기 전, 숙소 매니저 아저씨에게 모니 Moni 로 갈 교통편을 물어 봤다.

승객을 다 채워 출발하는 일반 택시 (현지 용어로 딱시 비아사 Taksi Biasa) 는 인당 10만 루피아고, 엔데 Ende 까지만 간다.

엔데에서 모니까지 가는 차량과 연계해주며, 5만 루피아를 따로 추가 지불해야 한다.

개인 대절 차량 (프라이빗. 현지 용어로 모빌 프리핏 Mobil Privit) 은 대당 100만 루피아로 모니까지 직통으로 간다.


우리가 루뗑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심하게 고생한 걸 아는 매니저 아저씨는 모빌 프리핏을 권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니 그냥 일반 택시로 가겠다고 했다.

고생 좀 하면 70만 루피아를 버는 일자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내일 아침 출발하는 일반 택시로 예약 부탁 드렸다.


첫번째 목적지는 월로보보 Wolobobo 전망대다.


깨끗하고 선선한 공기를 가르며, 정면에 보이는 이네리에 산 경치에 홀려 달리다 빠져야 할 길을 지나쳐 버렸다.


다시 되돌아 가다 가게에 들러 기름을 넣는데, 어떤 아저씨가 가게 옆 나무에서 과일을 따고 있다.

일행이 잠부라고 반갑게 외치니, 아저씨는 빙긋 웃으며 먹으라고 내민다.


그 모습을 보며 기름을 넣던 가게 주인 아줌마도 웃는다.

어제 바자와 입구의 오젝 기사들도 그렇고, 이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명랑하고 친절해 보였다.


인니어로 잠부 Jambu 라고 하고, 영어로는 그 유명한 구아바다.


한국인이 아는 구아바는 요렇게 생긴 걸 말하지만, 사실 구아바는 종류가 여러가지다.

영어는 잘 모르겠고, 인니어로 잠부 아이르 Jambu Air 라고 한다.

수분이 많아서 아이르(=물)라고 한다.

인니에서도 그냥 잠부라고만 하면 보통 이걸 뜻한다.


우리가 아저씨에게 받은 건 잠부 끌루뚝 Jambu Kelutuk 이라고 한다.

먹다 보면 조그만 씨앗들을 끌루뚝(=꿀꺽) 삼키게 되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잠부 끌루뚝은 열매 속 색깔에 따라 다시 두 종류가 있는데 이건 잠부 끌루뚝 뿌띠ㅎ Jambu Kelutuk Putih (=하얀) 라고 하고,


요건 잠부 끌루뚝 메라ㅎJambu Kelutuk Merah (=붉은) 라고 한다.


잠부 아이르의 사촌인 잠부 깐찡 Jambu Kancing 도 있다.

잠부 아이르에 비해 납작한 모양인데, 그 모양이 단추(=Kancing)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아직 먹어보진 못했는데, 과즙이 매우 달다고 한다. (잠부 아이르의 과즙은 좀 밍밍한 편이다.)

그래서 이 나무를 키우면 주변에 벌레가 바글바글 꼬인다고 한다.


이건 잠부 볼 Jambu Bol 이라고 한다.

공(=Boll -> Ball) 모양의 씨앗이 들어있다.


요건 잠부 모녯 Jambu Monyet (=원숭이) 이라고 한다.

아마 원숭이가 환장해서 붙은 이름이 아닐까 싶다.

과육도 먹고, 꽁다리에 붙은 씨앗도 먹는데...


꽁다리의 씨앗이 바로 캐슈넛 Cashew Nut 이다.

사실 잠부 모녯은 잠부의 종류가 아니다.

과일 모양이 잠부와 비슷해서 인니 사람들이 그냥 잠부라고 이름 붙인 모양이다.


기름을 넣었던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굳이 되돌아 갈 필요 없이,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 줬다.

구글에도 희미하게나마 표기되어 있긴 한데, 상태가 매우 안좋은지 네비에는 찍히지 않는 길이다.


그래도 설마 못다닐 길을 권하진 않았을 거라 믿고 따라 봤다.


비포장이지만 상태가 아주 좋다.

자동차도 별 무리 없이 지날 수 있어 보인다.


좀더 달리자 포장 상태가 좋은 길을 만난다.

길 우측의 보이는 건 커피 나무다.

할머니 한 분이 잘 익은 커피를 따서 포대에 넣어 짊어지고 가고 있다.


커피 나무


커피 나무들이 무슨 잡초라도 되는 양 길 가에 늘어서 있다.


사거리가 나왔다.

주민들만 이용하는 길답게 표지판 따위는 없다.

마침, 농부 차림의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길레 "말씀 좀 여쭐게요, 할아버지. 월로보보 가는 길이 어떤 거예요?" 라고 물어보니, "월로보보?"라며 한쪽 길을 가리켰다.

눈치로 보아 다른 말은 잘 못알아듣고 '월로보보'만 알아 들으신 눈치다. ㅋ

인니 깡촌 시골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중에는 종족어만 알고 인니어는 모르는 분들이 꽤 많다.


할아버지가 가리킨 길은 사거리의 네 길 중 길입구의 상태가 가장 안좋은 길이었다.

관광 포인트로 이어진 길은 투어 차량들이 자주 지나기 때문에 다른 길보다 상태가 더 빨리 나빠진다.


'어라? 이런 길을 자동차로 지난다고?'라는 생각이 드는 좁은 길이다.


월로보보 입구

아마 예전엔 여기서 입장료를 받았을 거 같은데, 지금은 지키는 사람이 없다.


갈림길이 나온다.


정글 트래킹 코스라는데, 길 상태가 엄청나게 안좋다.

하긴, 포장 도로를 지나며 정글 트래킹을 한다는 게 말이 안되긴 하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월로보보 전망대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입장료를 낸다.


텔콤셀(인니 최대 휴대폰 통신사) 기지국이 옆에 있었다.

주차장도 텔콤셀 기지국의 주차장을 사용하는 거 같다.

아마, 텔콤셀이 국유지에 기지국을 만들면서 포장 도로를 내었지만, 국유지라 지역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는 게 아닐까 싶다.


오토바이 주차료 2천 루피아, 입장료 인당 7천 루피아

아마 외국인 입장료는 따로 있지 않을까 싶다.

꾀죄죄한 몰골로 유창한 인니어를 하는 내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국인 입장료를 받았다.

요즘 들어 여행 가는 곳마다 거의 대부분 내국인 요금을 받던데, 아마 지역 주민들 눈에는 내가 마치 '서울말을 쓰는 때깔 좋은 도시 사람'처럼 보이나 보다.


주차장이 언덕 정상에 있기 때문에 따로 다시 오르막을 오를 필요가 없었다.

아주 좋다!


플로레스 지역에서는 물소보다 황소가 흔했다.

특이한 점은 모든 소들이 엉덩이만 흰 색이었다는 거.

신기해서 이후로도 소가 보이면 엉덩이를 확인했는데 한 마리도 예외 없이 전부 그랬다.


내가 너무 엉덩이만 봐서 부끄러워졌는지 소 몇 마리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월로보보 전망대는 이네리에 산 전체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해발이 높은 바자와 지역 중에서도 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구름이 전망대 밑으로 흐르기도 한다.


저 멀리 바자와 시내가 보인다.


아까 경치에 취해서 계속 직진했다가 되돌아 갔던 길도 보인다.


전망대 언덕 뒤편

움푹 패인 지형으로 보아 이 곳도 옛날에 분화하면서 생겼나보다.


별로 올라가보고 싶진 않은 구조물이다.

저거 무너져서 떨어지면, '차라리 한 방에 추락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곰곰히 해보기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다.

물론 비탈을 따라 대략 일흔 여섯 바퀴 정도 떰부링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저 소들은 내가 지들 쫓아가고 있다고 오해를 하는지 계속 앞으로 도망 간다.


급기야 길 옆 비탈로 내려간다.


한국에서 한밤중 귀갓길에 앞서 가던 아가씨에게 그런 오해를 받았을 때는 뭐 나름 이해가 갔지만, 이건 좀 억울하다.

싸우면 니들이 이기잖아. 가뜩이나 니들은 셋이고. 니들이 가진 거라곤 고작 맛있는 고기 뿐이지만, 난 돈과 귀중품이 있단 말이다.

...아, 납득이 갔다. 내가 가진 건 저 녀석들에게 필요가 없지만, 저 녀석들이 가진 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약탈 상황이 발생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상대방이 가졌는가의 문제다. 힘의 우위는 부차적인 문제다.

이 경우,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건 내 쪽이다.

따라서 소들의 회피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근데 나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이따 저녁에 소고기나 먹어야겠다.


산봉우리에 걸친 구름이 좀처럼 벗겨지질 않는다.

제법 구름이 빠르게 흐르지만, 벗겨질만 하면 다른 구름이 와서 또 덮는다.

좀 아쉽긴 하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고 돌아섰다.


비수기라 그런지 매점 건물은 닫혀 있었다.


전망대 길 한 켠, 기지국 담장에 가려 약간 구석진 곳의 벽에 Dilarang Bercinta (애정행위 금지) 라는 낙서가 있다.

하긴, 생식 호르몬 가득찬 뇌 상태를 사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미풍양속의 속박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청춘남녀라면, 으슥한 곳에 들어서기만 해도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마련이다.

그리고, 애정행위 금지라는 낙서는 오히려 그들의 충동을 촉발할 거다.

많이들 여기서 그랬나 본데,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능가! 하는 생각이 들기 딱 좋다.

어차피 벌금이나 처벌을 하겠다는 내용도 없고.

인류는 그렇게 흥성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