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특이했던 사람] 2. 어느 신입 사원

명랑쾌활 2023. 4. 7. 11:16

나이는 서른 셋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력서도 그 나잇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대단하지만 대단하기만 한 스펙인,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면접을 봤지만 영업 업무에 전혀 맞지 않았다.

취업률 100%를 달성하고자 했던 인력업체 대표 새끼가 사장에게 청탁해서 억지로 밀어넣지만 않았다면, 평범하게 서로 지나쳐 기억에도 남지 않았을 인연이었다.

그래도 어차피 같이 일하게 됐으니, 어떻게든 잘 해봐야 하지 않겠나...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외국인 고용 정원 추가와 취업 허가를 내려면 두어 달 걸리기 때문에, 보통 입사 예정자는 귀국해서 대기한다.

입사가 결정된 신입도 일단 한국으로 복귀하도록 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인력업체에서 연수 받는 동안 있었던 짐을 맡겨도 되겠냐 물었다.

무슨 짐인지도 모르는데 직원이나 경비에게 맡아두라고 했다가 나중에 뭐 없어졌다고 하면, 서로 애매하게 된다.

천상 내가 직접 받아서 확인해야 한다.

사무실에 보관할테니, 업무 시간에 회사로 오라고 했다.

오기로 약속한 날, 그는 퇴근 시간을 두 시간 넘겨 도착했다.

비행기 시간 늦을 거 같다며, 도착하자 마자 동기생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자기 짐들을 후다닥 정신없이 내려 놓는다.

같이 출발하기로 한 동기가 늦어서 출발이 늦었다는둥, 별 성의도 없는 핑계와 사과를 하고서는 짧은 반바지, 반팔티, 슬리퍼 복장에 작은 손가방 하나 들고서 산뜻하게 떠났다.

난 지때문에 저녁 약속을 한 사람에게도 늦는다고 연락하고, 회사에 혼자 남아 기다려야 했는데. 이런 ㅆ...

 

그 놈이 맡겨 놓고 간 짐 꼬라지

짐 맡겨도 되냐는 전화를 이틀 전에 받았었다. 그동안 지구 멸망을 막느라 도저히 시간이 없었나보다.

회사에 보관한다는데 박스 테이핑도 안하고 이 꼬라지로 두고 갔다.

누가 봐도 급하게 대충 때려 넣은 꼬라지인데, 과연 늦은 이유가 동기였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알뜰한 성격인지 바가지, 욕실 슬리퍼, 쓰다 남은 비누와 두루마리 휴지, 심지어 냄새 나는 빨래감까지 둘둘 뭉쳐 쳐박혀 있다.

홀가분하게 가고 싶으셨는지 캐리어 가방도 맡기셨다.

이 쓰레기 더미를 회사 업무 공간에 보관하라는 건가? 친구 집에 맡겨도 욕먹을 꼬라지인데?

가장 심각한 건, 한국에서 대기하는 동안 훑어 보라고 영업 부서장이 준 회사 다이어리였다. (회사 제품군 소개가 있다.)

책들 때려 넣은 박스에 밑도 아니고 옆에 꽂아 넣은 바람에, 이게 뭔 꼬라지냐고 대충 훑어보던 영업 부서장 눈에 딱 걸려 버렸다. (영업부에서 일할 예정이다...)

아, ㅆㅂ... 안좋은 예상이 틀리길 바라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틀릴 줄은 몰랐다.

부적합한 인재가 아니라, 그냥 사회적 개념이 없는 거 아닌가.

 

 

취업 허가가 떨어질 시기가 윤곽이 잡혔다. 2개월 후로 잡힌 인니 입국 일정을 통보하는 이메일을 신입에게 보냈다.

신입에게서 답장이 왔다.

회사 처우가 어떻게 되냐, 퇴직금은 어떻게 되냐, 자기가 살게 될 곳은 어디냐, 그 곳 시설은 어떠냐 등등의 질문이 내용 대부분이었다.

어후 싯팔, 회사 처우나 퇴직금은 면접 때 다 설명해줬잖냐. 내가 면접 겪는 입장이던 시절에 입사 전에는 그런 거 대충 얼버무리고는 입사하고 나면 그제서야 불리하고 엿같은 조건들 밝히는 수작질에 하도 당해서, 너한테는 얼마나 죤나 자세하게 설명해줬는데... 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너그럽게 이해해나 싶었다.

면접 때는 다른 연수생 동기들 다 취업되고 마지막으로 혼자 남아서 아무데나 취업만 되면 감지덕지라는 상태라 대충 들었다가, 한국 가서 친구들 만나 취직했다고 자랑하다보니 친구들이 당연히 처우 같은 거 물어봤겠지.

신입이 보낸 이메일 내용 군데 군데 ^^, ^^; 같은 이모티콘이나 ㅋㅋ 집어 넣은 것도 30대 청년들의 친근감 표시일 거다. 직장 상사에게 회사 관련 메일을 보낼 적에도 그 정도는 넣어줘야 센스있는 대한민국 청년 세대 아니겠능가.

청년세대가 뭘 하든 지적질 하면 꼰대 취급 받는 거다. ㅋㅋ든 ㅅㅂ든 입다물고 받아 들여야 옛다 던져주는 존중이라도 받을 수 있다.

우리 특이한 신입 덕분에 생각이 깨이는 거 같다.

 

입국일 2일 전, 신입사원이 카톡을 보내왔다.

- 혹시 가능하다면 일정변경이 되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28일 일정이 미루어질걸로 생각했기 때문입다

뭔 소리지? 뭔 소리인지 '대충은' 이해하겠는데 뭔가 핀트가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8일 일정이 미루어질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두 달 전에 일정 통보한 이후로 변경한 적 한 번도 없었다.

2주 전에 항공권 날짜까지 확정해서 보내줬는데 뭔 근거로 일정이 미루어질 거라 예상했다는 건지.

일정 변경이 가능하냐는 질문도 항공권의 일정을 '회사에서' 변경해줄 수 있냐는 소리인 거 같다.

혹시 한글을 쓰긴 하지만 기존 한국어와는 다른 '청년어'라는 게 따로 있어서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뭔 소리인가 해독하느라 쓸데없이 시간 낭비했다. 늦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안오겠다고 하면 땡큐고.

일정 변경하고 싶은 이유만 물었다. 사장에게 보고해야 하니까.

28일, 3일 치료 예약을 하셨단다.

발목을 '삐어서' 치료한다는 건데... 발목 삔 건 '2달 전'이었다. 한국 간지 얼마 안돼서.

얘 뭐지? 입대일 임박해서 며칠이라도 미루고 싶은 거 같은 건가?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안오면 안되나?

한 3년 정도 충분히 치료해서 강철 발목 만들고 오면 좋잖아?

 

애석하게도 사장은 개소리말고 발목 삔 정도는 인니에서도 회복이 가능하니 일정대로 들어오라고 했다.

매우 안타깝게도 신입은 결국 원래 일정대로 인니에 입국했다.

다행히도 발을 절거나 하는 연기는 하지 않았다. 서로 1도 믿지 않는 일로 위로와 걱정 주고 받는 시늉하는 것도 고역이다.

 

입사하자마자 신입은 기대(?)했던대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출근 첫날부터 담배 피우고 있는 내게 와서 담배를 빌렸다. (내가 담배 피우러 가자고 한 거 아니다.)

담배 살 시간이 없었다는데... 너 오늘 첫 출근이야. 어제까지 쉬었어.

훗날 퇴사할 적에 그러는데, 말이라도 붙이려는 구실로 그랬었댄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 꼴로 담배가 없다며 내 담배를 빌렸구나. 일주일에 하루, 대화의 시간을 갖자 뭐 그런 거.

 

아침 못먹고 나온 경우 회사에서 라면 정도는 먹을 수 있다고 알려주면서, 매일 먹는 건 사장이 안좋아하니 눈치껏 먹으라고 했다. 나도 자주 먹는데, 대신 가끔 내 돈으로 사다 채워넣는다고도 알려줬다.

신입은 알았다고 하더니, 야무지게 매일 먹었다.

 

입사 1주일 좀 지나 사장이 참석하는 주간 회의 중에, 신입은 양팔꿈치를 회의 탁자에 올리고 손 위에 턱을 괸 자세로 다른 사람들 말을 듣는 패기를 보였다.

스마트폰 정도는 대놓고 들여다 봤다. 이사, 부장, 차장도 중요한 연락인지 티 안나게 곁눈질로만 확인하는데.

 

월급 제 날짜 나오냐, 안나오면 어쩌냐, 달러로 나오면 환전은 어쩌냐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

퇴근하고 사석이 아니라, 근무 시간에 잠깐 회사 내 흡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중에.

 

입사 4주차 주간회의 시간, 사장 맞은 편에 앉았는데 꾸벅꾸벅 졸았다. ㅋㅋㅋㅋ

회사가 집이고, 사장, 이사, 부장이 가족처럼 편했나 보다. 

 

첫 월급 지급한 다음 날, 하루치 월급이 미지급됐다는 얘길 해왔다. (입사일이 말일이라 한 달하고 하루를 더 일했다.)

하루치 급여 미지급 된 건 맞지만, 대신 금액 뒷자리를 100불 단위로 맞춰 주려고 원래 약속한 월급보다 40불 더 책정해 지급해주고 있다고 돌려 말했다. 그냥 받지 말라고 자르면, 내가 강압한 셈이 되니까.

정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사장에게 의견 전달해주겠다고 하니, 그렇게 해달란다.

사장은 뭐 그런 새끼가 다 있냐고, 하루치 지급하고 월급 40불 더 책정했던 건 없던 일로 하라고 했다. 

 

 

신입은 입사 6주만에 자진 퇴사했다.

첫 월급 받은지 2주 만이다. 퇴사할 생각은 그 훨씬 전부터 이미 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매월 받을 월급 40불 오르는 것보다 하루치 급여 덜 받은 게 더 중요했나 보다. 훌륭한 알바 마인드다.

 2주치 급여도 깔끔하게 지급해줬다. 귀국 항공권 비용 제할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천원 한 장이라도 덜 받으면 자신이 ㅄ호구라도 되는양 아득바득 하는 게 측은했다.

회사는 1년 비용으로 취업 허가, 항공권 등 비용으로 약 5,000불을 들였으니 46주 만큼을 날린 셈이다.

그래도 회사나 신입이나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이다.

회사는 신입 착취할 생각도 없었고, 신입도 놀면서 인건비 따먹으려 한 거 아니다.

그저 취업율 100% 달성하겠다고 청탁으로 밀어넣은 인력업체 대표 새끼 때문에 억지로 엮인 괴로운 인연이다.

 

내게는 소위 말하는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이라는 청년 세대의 일면을 직접 겪을 수 있는 기회였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그런 스펙을 얻은만큼 뭘 잃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

자기랑 맞는 직업 찾아서 잘 살고 있길 바란다. 인니 쪽은 쳐다도 보지 말고.

애초에 일본어 실력을 그 정도로 쌓고서, 왜 인니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뭘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정신없이 이것 저것 시도하다 어버버 떠밀려 왔던 게 아닐까 싶다.

부디 자기 인성 적성에 맞는 일 찾아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잘 지내든 말든 나랑 상관없으니, 기왕이면 잘 지내는 편이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