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I

대상포진

명랑쾌활 2017. 8. 15. 12:25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대상포진이라니! 내가 대상포진이라니!!


저랑 거의 상관없을 것 같았던 대상포진에 걸려버렸습니다.

대상포진은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가 원인인데, 전 게을러서 피로할 일이 거의 없고, 스트레스도 그때그때 털어버리는 편이거든요.

평생 흡연 한 번 안해본 사람도 폐암에 걸릴 수 있으니, 생노병사는 오묘한 자연의 섭리인가 봅니다.


대상포진 경험담을 잠깐 소개해보겠습니다.

저같은 경우, 감기몸살 비슷하게 열 오르고 아프고 난 뒤 며칠 후 오른쪽 가슴 하단에 엄지 손톱만 한 붉은 반점이 나면서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가벼운 감기몸살이라고 생각했고, 붉은 반점은 땀띠나 피부 트러블인가 싶었지요.

그러나 붉은 반점의 증상이 달랐습니다.

가려운듯 아픈듯 한 것이 습진 비슷한데, 그 감각이 피부가 아니라 보다 안쪽 깊은 곳까지 느껴지더군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피부로부터 몸 속 깊은 곳까지가 아니라, 반대로 몸 속 깊은 곳에서 피부로 올라온 겁니다.)

하필 그 날 회사 회식에 2차까지 폭음을 강요 당하는 바람에 술에 취한채 잠들어서, 그 날 밤 증상은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그 폭음이 대상포진 증상을 활짝 꽃피우게 하는데 확실한 일조를 했겠지요.

다음날도 붉은 반점의 크기는 그리 변하지 않았지만, 왠지 통증은 점점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피부가 아니라 마치 그 밑의 갈비뼈가 타박상을 입은듯한 통증입니다.

밤이 되자 통증이 더 심해져서 뼈가 쑤시고 결리는듯한 통증 때문에 잠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잠 잘자는 편이고, 통증에 꽤 익숙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잠은 잘 잤습니다.

그 다음날 회사 업무도 그냥저냥 잘 봤구요.

지옥은 그 날 밤(반점 올라온지 3일째 밤)에 시작됐습니다.

가슴에서 등짝까지 꿰뚫은 꼬챙이가 나사 돌아가듯 살살 돌아가는듯한 통증에, 이따금 누군가 꼬챙이 끝부분 옆을 툭 때려서 흔든듯한 통증이 겹쳐 옵니다.

더 환장하겠는 건, '밤새도록 끊임없이' 그런 통증이 계속된다는 겁니다.

절대 과장이 아니예요.

왜 대상포진이 통증 강도 세기로 유명한지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너무 아파서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다음 날 새벽, 날이 밝아올 즈음 통증이 줄었습니다.

(왜 무슨 병이든 밤이 되면 더 아프고, 낮에는 덜 아픈지 신기합니다.)

안아픈 게 아니라, '견딜 수 있을 정도'만 아프다는 뜻입니다. ㅋㅋ

거울로 보니, 등짝 오른편에도 가슴 부위와 대칭으로 붉은 반점이 올라왔더군요.

그리고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도 반점이 올라왔구요.

반드시, 꼭, 병원에 가야한다는 건 지난 밤 아파서 끙끙 앓면서 이미 다짐한 바입니다.

치료제는 둘째치고, 진통제만은 꼭 받아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회사에 먼저 출근해야 합니다.

월급쟁이니까요.

누가 봐도 이견이 없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화로 상황을 보고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아프다는 사람 억지로 회사 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합니다.)

알았다고 병원 가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월급쟁이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일은 의외로 고과 및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언젠가는 그에 따른 대가를 치루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월급쟁이는 회사에 '출근'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의무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인간이란 족속입니다.

회사에 출근해서 얼마나 아픈 상황인지를 직접 보이고, 허락을 맡고 조퇴를 하는 편이 낫습니다.


1시간을 걸려 회사에 출근해 상황을 보고하고, 조퇴를 허락 받았습니다.

다시 1시간을 걸려 집 근처 병원으로 갔고요.

오가는 내내 정신은 몽롱하고, 차량의 조그만 진동에도 통증이 가슴 깊이에서 솟구쳐 오릅니다.

바보같은 짓 같아도, 이게 맞습니다.

월급쟁이니까요.


의사는 환부를 보고, 증상 설명 몇 마디 듣자마자 병명을 확진했습니다.

헤르페스 조스터 Herpes Zoster, 대상포진입니다.

이런저런 약을 처방해 주는데, 한국돈으로 10만원 정도 나왔습니다.

의료보험이 안되니까요.


병원에 갔다 온 날 밤, 진통제를 먹고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낮에 고된 일 하고서, 밤에 '에구구~ 뼈마디야.' 하면서 누워 힘들게 잠을 청할 정도의 통증이랄까요.

그 정도의 통증인데도 좋아서 웃음이 실실 나오더군요. 정말로요! ㅋㅋㅋㅋㅋㅋ

전날 밤의 통증에 비하면 이 정도는 통증도 아니었거든요.

인생의 기쁨이나 행복, 슬픔, 좌절 등의 수위도 이처럼 이전 상황과 대비되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공의 성취가 높으면 높을수록, 거기서 실패해서 떨어지는 나락의 깊이가 곧 불행의 정도겠지요.


뭐 어쨋든, 꽤 잘 잘 수 있을 정도의 참을만 한 통증이었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플 때 그 통증을 완화시킬 수단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