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혀는 칼보다 더 무섭다

명랑쾌활 2024. 8. 7. 08:03

어떤 사람이 천하의 나쁜 놈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직접적 근거는 약하다

'아'라고 한 것을 '어'라고 했다고 살짝 비튼다.

거기에 다른 사람의 카더라를 양념으로 섞는다.

 

듣고 '완전히' 흘려 버리는 인격자는 매우 적다.

듣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은' 믿는다.

그럴듯 하니까.

딱히 안믿을 이유가 없으니까.

소문을 받아들이고 경계하는 편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을 믿는 것보다 안전하니까.

 

피해자가 그 소문을 뒤집겠다고 나서봐야 거의 소용없다.

누굴 붙잡고 해명해야 할지도 문제지만, 애초에 하지 않은 걸 안했다고 해명하는 것 자체가 우습고 짜증나는 일이다.

게다가 이미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사실일 거라고 받아들인 상태를 뒤집기 어렵다.

사람은 원래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스스로 논리를 덧붙이는 '생각 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게 된 사람이 말하는 그 대상이 좋은 이유들은, 그 이유들 때문에 그 대상을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이미 좋아하게 된 이후에 이래서 좋다 저래서 좋다 스스로 덧붙인 것들이다.

이미 믿어버린 소문을 깨려고 하면 반발하는 심리가 발생한다.

당사자가 증거를 들이밀며 뒤집기 어렵다. 

논리의 영역 같지만, 실상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내 통찰이 틀렸다는 뜻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또한 뜬소문을 믿어 버린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수치심도 작용한다.

피해자가 나쁜 사람이어야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고, 멍청하지 않은 게 된다.

 

설령 소문이 잘못되었다고 해명이 되어도 그 여파는 여전히 남아있다.

감정이란 건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지울 수 없다.

불쾌한 일이 있어서 발길을 끊은 식당이,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꺼림칙 한 게 사람 마음이다.

헛소문을 받아들이면서 나쁜 사람이라고 믿어 버렸을 때 이미 가지게 된 부정적인 감정은, 그 원인이 해소되었어도 '감정'으로 여전히 남는다.

만약 감정에 숫자 표시가 있다면, 100에서 50으로 감점된 부분은 절대로 다시 100으로는 복구되지 않는다.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지만, 어쨌든 뭔가 그럴만 한 이유가 있으니 그런 소문이 돈 거겠지'

이런 식으로 부정적 인식은 남는다.

 

별 거 아닌 뒷말 한 마디가 사람을 이렇게 망가뜨린다.

혀는 칼보다, 펜보다 더 무섭다.

물적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드라마 <피노키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