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자신의 하찮음에 대한 자각

명랑쾌활 2024. 7. 26. 07:13

군생활 가장 힘들었던 건 일과 시간 외 모든 내무반 생활이었다.

훈련으로 한정한다면 흔히들 꼽는 유격이 아니라, 공지합동훈련이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에 남는다.

공중 지상 합동 훈련, 말 그대로 공군과 지상군의 합동 훈련이다.

 

새벽 4시 기상

4시 반 연병장 집결, 비닐 봉다리에 담긴 아침 짬밥 분배, 대대장 훈화

5시 출발.

50분 걷고 10분 휴식

7시 아침 짬밥 식사 30분

50분 걷고 10분 휴식

12시 60 트럭으로 날라온 들통 점심 짬밥 배식

50분 걷고 10분 휴식

걷고 또 걷고...

오후 7시 목적지 도착, 텐트 설치, 배식, 개인 정비

총 14시간, 행군 거리 65km.

 

다음날 오전 6시 기상, 배식, 텐트 철수, 군장 준비

7시까지 지정된 진지에 배치, 전투기 폭격, 탱크 포격 관람

끗...

 

오전 8시 부대 복귀 출발

걷고 또 걷고...

걷고 또 걷고...

밤 11시 부대 도착, 연병장 사열, 대대장 훈화

훈련 끗

이틀 간 총 행군 거리 130km

 

주구장창 걷기만 한 게 뭐가 힘들었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걷는 게 힘들다.

군장 20kg과 M60 기관총 10kg을 매고 걷는다. 군화는 내구력에 충실한 신발이라 쿠션도 없다.

내 리듬대로 걷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적당한 속도가 다른데, 모두가 같은 속도로 걸어야 한다. 처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 줄줄이 걸어가는 간격이 서서히 벌어지다가 호통이 떨어지면 반쯤 뛰듯 다시 간격을 줄여야 한다. 줄 뒷편일수록 반은 걷다 반은 뛰다 하게 된다.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속적 고통 속에 멘탈이 서서히 부서지는 게 더 힘들었다.

 

하지만 보병이 훈련 중 걷는 건 일상적인 일이다.

공지합동훈련이 유독 기억에 남은 이유는,

해 뜨기 전 출발해서 종일 걸어 해지고 나서 도착하기까지 오만 생각을 하며 힘들게 도착했는데, 다음날 전투기가 쑈오옹 날라와서 폭격 펑펑펑 하고 끝났다는 거였다.

하루 종일 했던 그 고생이 죤나 하찮았다는 현타가 왔다.

'와, 대작전 하에서 일개 보병은 진짜 조또 아니구나' 하는.

이 때의 인상이 기억에 남아 20년 뒤 비로소,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찮고, 뭐 좀 있어 보이려 안간힘 써봐야 결국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됐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여담인데, 당시 부대 복귀할 즈음 싸락눈이 내렸었다.

부대 도착해서도 연병장에 도열해서 대대장 훈화를 들어야 했다.

훈화를 듣는 동안, 걷느라 덥혀진 다리는 뻣뻣하게 식었다.

훈화 끝나고 우향 우 지시를 따라 몸을 틀었는데, 오른발 군화 바닥이 언 땅에 살짝 붙었나보다.

군장까지 합친 모든 체중이 오른발로 지지하면서 회전하는데 발바닥이 붙었으니,

정강이 아래는 그대로 앞쪽 방향을, 허벅지 윗쪽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무릎이 우드득.

그 상황에 무릎 쥐고 쓰러지면 두고두고 갈굼 받으니, 절뚝이는 거 최대한 꾹 참고 내무반으로 복귀했다.

그 시절에는 피가 철철 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심각한 게 눈에 직접 보이는' 상처가 있어도 치료 받으러 가겠다고 먼저 말하면 군기 빠졌다고 안좋게 보던 분위기였다.

상처를 발견한 선임이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미련하게 말을 하지 않았냐, 빨리 의무대 가라'고 먼저 말을 해야 알겠습니다 하고 따르는 게 미덕인 시절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겉으로는 표시 안나는 무릎이 쑤신다는 소리하며 의무대 가겠다고 하면 개똘아이 취급을 받았을테니, 그냥 참고 버티는 수 밖에 없다. 그게 자랑스런 국군의 군기다.

 

그 후로 컨디션 좋지 않거나 피곤하면 오른쪽 무릎이 쑤신다.

허리를 굽혀 발끝에 손을 뻗으면 오른쪽 무릎만 아프면서 저절로 굽어진다.

평생 동안 안고 살아야 하는, 내 군생활의 흔적이다.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고 병신스럽기만 한.

 

그렇다고 보병이 존재감이라도 있길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