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뒀으면 진실은 묻히고 끝날 이야기가 범인의 설레발로 인해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일은 꼭 영화의 과장만은 아니다.
물론 범인도 그런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이유는 있다.
직원 파업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난 이후의 첫 주간회의였다.
여러모로 어수선한 시점이라 사장은 특이사항이 없다면 보고서를 서면 제출하고 회의를 끝내자고 했다.
케빈은 굳이 반드시 보고해야 할 사항이 있다며, 반쯤 일어난 사람들을 다시 앉게 했다.
케빈은 최근 발생한 로컬 신규 오더 품질 불량 건을 지적하며, 이 건 때문에 로컬 시장 쪽에 회사 이름이 안좋게 퍼져 자신이 진행하는 신규 오더는 커녕 받은 오더도 취소 당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영업 실적 낮은 건 니들 본사 잘못이야' 라고 맥이는 거다. 사장 면전에 대놓고.
기분이 매우 상한 사장은 관련 사항 철저히 조사해서 특별 보고 올리고, 관련자 문책 조치하라 내게 지시했다.
품질 불량이 발생한 로컬 오더는 라이언이라는 현지인이 발주했다. 고객사로부터 오더를 받아 생산할 수 있는 업체와 연결해서 커미션을 받는 외부 에이전트였다.
찾아봤지만 샘플도 없었고, 우리 회사가 만든 샘플에 대한 고객사 컨펌 레터도 없었다. 받았다는 직원도 없었다. 신규 제품인데, 발주서만 덜렁 있었다. 발주서도 영업부가 아니라 현지인 공장장이 직접 받은 거였다.
공장장에게 사실 확인을 했다.
공장장은 오더를 받고, 라이언에게 샘플 어떻게 할지 문의했었다. 라이언은 샘플은 괜찮다며 오더에 적힌 스펙대로 제품을 납품하면 된다고 했다. 납품한지 1주일 후, 라이언은 공장장에게 고객사가 불량 컴플레인을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심각한 불량은 아니니 자신이 고객사에 가서 풀면 된다며, 납품 시한 맞추는 게 더 중요하니 나머지도 계속 납품 진행하라고 했다.
공장장은 라이언의 말에 따라 후속 납품을 진행했다. 한 번 더 컴플레인이 전달됐지만 라이언은 괜찮다며, 납품을 지속하라고 했다. 그리고, 돌연 전량 반품이라는 통보를 받은 상황이었다.
샘플 컨펌도 없이 몇 만 장 찍어서 납품했더니 자기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면 누가 책임질 건가. 가족이 운영하는 소규모 공장이라도 샘플 컨펌 없이 신규 제품을 진행할 순 없다. 오더가 영업부를 거치지 않고 공장장에게 직접 전해졌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라이언이라는 에이전트가 우리 회사의 직원이었어도 문책 받았을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공장장은 라이언이 누군지도 딱히 숨기지 기색 없이 술술 얘기했다.
라이언은 케빈의 전 직장에서 나와 에이전트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케빈의 전 직장 출신이었던 공장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지금껏 케빈이 발굴해온 줄 알았던 거의 모든 로컬 오더는 라이언이 가져온 것이었다.
케빈은 라이언에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굳이 영업부 통하지 않고 공장장에게 직통으로 연락해서 일을 진행하도록 지침을 내렸고, 공장장에게도 그렇게 지시했다고 한다.
한국인 영업부 부서장의 지시였으니 현지인 공장장도 순순히 따랐을 뿐이었다. 나나 사장에게는 케빈이 이미 전달했겠거니 생각했을 거였다. 아니면 아예 생각 없이 시키는대로 했거나.
이외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케빈이 몇 차례 진행했던 우리 회사의 불용자재 매각과 재활용 자재 매입에도 라이언이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정황만으로도 리베이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민감한 사항이라, 오히려 정황만으로 보고하기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케빈이 오히려 보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상황을 키웠다.
고문이 한국에서 복귀한 후 첫 주간회의 때, 로컬 오더 품질 불량 문제를 재차 제기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고문 역시 주간회의를 간단히 하고 마치려 했는데, 케빈이 또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마치 본사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고문에게 SOS 신호라도 보내듯, 아주 심각한 불량이며 이로 인해 자신의 로컬 오더 판로 개척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문은 다시 내게 철저한 진상 조사와 관련자 중징계를 지시했다. 나도 이제 더 이상 덮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전 조사와 달리, 얼버무리면 다 뒤집어 쓴다는 기색을 풍기며 마치 경찰 수사하듯 철저히 조사했다.
라이언으로부터 온 문서 증거는 이메일을 통해 보내온 발주서 한 통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문자 메시지나 전화를 통해 진행됐기 때문에, 나는 문자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고, 알리바이를 따지고, 필요하면 대질 시켜서 서로 했다는 말을 확인했다. 라이언은 회사에 오지 않고, 문자로만 대응했다.
조사 결과를 정리해서 2장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해 고문과 사장에게 제출했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라이언은 '고객사로부터 컴플레인과 불량 제품 사진을 받아' 우리 회사 공장장에게 전달하면서, 큰 문제는 아니니 사진 속 불량만 잡고, 납품은 계속 진행하라고 했다.
고객사의 두 번째 컴플레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컴플레인 당시, 라이언이 사우디에서 메카 순례를 하고 있어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혹은 안했거나)
고객사는 라이언의 응답을 기다리다 결국 전량 반품을 통보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라이언은 전량 반품을 우리 회사에 통보했다.
애초에 고객사는 오리지널 샘플을 라이언에게 전달했지만 라이언은 우리 회사에 넘기지 않았다.
라이언은 외부 에이전트다. 업무 절차를 따르지 않은 공장장이 책임져야 한다.
왜 라이언과 직통으로 의사소통을 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공장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중징계를 받는 상황이었다.
공장장이 딱했다. 공장장은 케빈의 지시를 따른 것 뿐이다. 공장장 입장에선 '당신은 영업부니 나에게 지시할 권한이 없다'라고 할 수도 없다.
케빈에게 상황을 얘기해주고 어떻게 하길 바라냐고 물었다.
"전 그렇게 지시한 적 없어요. 그리고, 샘플 실물도 없이 생산 진행한 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데요.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여전히 남 얘기다. 아무런 공감이 없다.
이대로라면 공장장을 해고 조치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품질부서장과 '명목상' 영업부 담당자인 재스민에게 이대로라면 공장장이 해고될 수 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경고 징계를 나눠 받아 주기를 부탁했다. 최종적으로 나도 같이 징계를 받겠다고 했다. 둘 다 자신들이 통보 받지도 못한 일로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을 억울해 했으나, 공장장의 입장을 생각해서 기꺼이 받아 들였다.
사장과 고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는 케빈과 라이언의 관계는 명시하지 않았다. 불량 사고의 팩트를 나열하는데 삽입해서는 안되는 정황일 뿐이었다.
대신 공장장과 품질 부서장, 제시카와 내가 징계 대상자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조치는 주간 보고서에도 명시하여 공식화 됐다. 퇴사할 내게는 별 의미는 없지만, 남 일 보는듯한 케빈의 표정에 기분이 더러웠다.
주간 회의가 끝나고, 케빈에게 물었다.
이 불량 문제는 라이언이 공장장하고 너하고만 의사소통을 해서 크게 터진 거고, 품질 부서장하고 재스민,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일로 징계를 받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케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 아무 생각 없는데요, 형님."
니가 뭘 어쩔 거냐는 뜻인데...
그럼 나도 참을 이유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