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권력욕에 불타는 마을 반장 선거

명랑쾌활 2021. 4. 26. 11:47

일전에 포스팅한 자동차세 납부 이야기에, 실거주 증명서 발급해주는데 10만 루피아를 요구했던 반장 나으리가 있었습니다. (https://choon666.tistory.com/1502)

발급에 필요한 서류들을 반드시 빨간색 플라스틱 파일집에 넣어서 제출하라던 그 권위주의의 화신이셨죠.

10만 루피아를 뜯긴지 약 일주일 후, 마침 반장 선거가 실시를 앞두게 됐습니다.

한국이라면 초딩도 하지 않을 유치한 수작질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펼쳐졌습니다. ㅎㅎ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몇 가지 설명드립니다.

1. 인니에도 한국의 통반장 같은 직책이 있습니다.

한국의 통에 해당하는 에르웨 RW (Rukun Warga) 는 '주민 화합회'라는 의미로, 통장은 끄뚜아 에르웨 Ketua RW라고 합니다.

통상 남성이 통장일 경우 빠 에르웨 Pak RW, 여성이 통장일 경우 부 에르웨 Bu RW 라고 합니다.(남성 통장의 부인의 경우도 부 에르웨라고 합니다.)

한국의 반에 해당하는 에르떼 RT (Rukun Tetangga) 는 '이웃 화합회'라는 의미입니다.

2. 직제상 통장이 반장의 상급자이긴 하지만, 상하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관할 반에 해당하는 일은 반장의 결정이 우선권을 가지며 통장이 간섭할 수 없습니다.

반장 부재시 대행자를 지정하거나, 반을 넘어서는 일(예를 들어 반장들 간의 문제 조율)하는 것이 통장의 역할입니다.

이는 통장이나 반장 모두 선출직이기 때문이며, 인니 행정 전반 기조가 그렇습니다.

가령 군수라 하더라도 이장의 일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상하 관계, 상명하복 문화가 심한 편인 한국은 암묵적으로 '윗사람'의 방침에 순순히 따르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인니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드물긴 하지만, 사안에 따라 공개적으로 들이받기도 합니다. '어차피 너나 나나 선출직이다'라는 태도로요.

 

 

 

이 이야기는 1통4반(가칭) 단톡방에서 오고간 멘트들을 간추렸습니다.

어엄청나게 길고 쓸데 없는 말도 많아서 중요한 부분만 정리했습니다.

 

어느 날, 4반 단톡방에 1통장 대리인(자잘한 일 대신 처리해주는 조수같은 사람)이 글을 올립니다.

- 1통장 대리인

"금번 반장 선거를 00일부터 00일까지 실시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주민 모임을 하지 않습니다. 선거 담당자가 집집마다 방문할 예정입니다. 후보자는 1번 이몽룡, 2번 성춘향입니다."

이에 현 4반장인 변사또(저한테 10만 루피아 뜯은 거만한 놈)이 댓글을 날립니다.

- 4반장 변사또

"저를 신임하는 대다수의 주민들이 있습니다. 선거에 앞서, 저에 대한 신임 여부를 본 단톡방을 통해 투표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집집마다 방문함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감염 위험으로부터 안전합니다."

"이번 선거는 문제가 큽니다. 본 건 관련하여 선거 진행단은 저와 충분한 협의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반장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겁니다."

- 1통장 대리인

"실례지만, 일전에 당신(변사또) 자택에서 두 시간 가량 의견 나누었고, 선거 실시에 대해 합의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전부터 당신의 반장 업무 수행에 문제가 많다는 주민들의 항의들이 수 차례 1통장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선거는 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합니다. 당신의 동의 여부에 따라 실시할지, 하지 않을지를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공개 투표는 주민들 간의 화합을 해치며,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현 4반장 변사또 자신도 정식 선거를 하게 되면 자신이 당선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부가 집을 비우는 일이 잦고, 거만하며, 돈을 밝히기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 평판이 매우 안좋거든요.

그래서 정식 후보로 나오지 않고, 신임 투표 먼저 해서 불신임 결과가 나오면 그 때 선거를 하던가 하라는 쪽으로 질척거리는 겁니다.

부정적 표현은 삼가는 인니 문화와 기명 투표라는 점을 이용하려는 시도입니다.

 

며칠 후,

변사또가 코로나의 심각성을 다룬 언론 보도 링크와 함께 글을 올립니다.

- 4반장 변사또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데, 집집마다 방문한다는 건 매우 위험합니다. 본 건 관련하여, 저는 방역 담당자에게 질의하였고, 매우 위험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번 선거 관련하여 더 논의해야 합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주민이 계시면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래로 변사또가 코로나의 위험성에 관련한 링크와 글들이 줄줄 이어짐

-1통장 대리인

"자택 방문 투표 방식은 관할 관청이 이미 승인했습니다."

 

다시 며칠 후,

- 4반장 변사또

"어제 반장 후보자 두 명이 제 집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코로나 사태에 진행하는 투표의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돌려보냈습니다. 4반의 책임자는 현재 저입니다. 전 4반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투표 진행을 멈춰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4반의 현재 반장인 제가 동의하지 않고 선거를 강행하는 것이 무슨 민주주의입니까? 절차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 문제 관련하여 동장님과 면담을 했습니다. 코로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단톡방을 통해 제 신임 투표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고, 동장님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셨습니다."

"<동장으로서 조언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감염 위험이 큽니다. 선거 관리회 주관으로 공식적인 단톡방을 따로 만들어 투표를 진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겠습니다.>"

"위 동장님의 조언에 따라, 단톡방을 통한 제 신임 투표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만약 단톡방에 입장하지 않는 주민이 있을 경우 제가 반장을 연임하는데 불만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동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4반 거주민들 중 주민등록지가 이곳으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문제라는 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곳에 주민 등록이 되어 있는 원 거주민들은 모두 절 신뢰하고 있습니다. 타지에 주민 등록이 되어 있는 외지인들이 저에 대해 험담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1통장 대리인은 변사또 글을 씹어버리고, 투표 용지 샘플 사진을 올립니다. ㅋㅋ

- 4반 주민 A

"변사또 반장님, 정말로 선거 후보로 나오시지 않는 건가요? 만약 나오신다면 전 반드시 반장님을 지지할 거예요."

전후사정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척 완전히 맥이는 글입니다. ㅋㅋㅋ

- 4반 주민 B

"변사또 반장님, 선거는 법과 절차대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이 단톡방에 올리는 건 주민 화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음 날,

1통장 대리인이 동장으로부터 받은 공식 서류라며 문서 하나를 올립니다.

대략 4반장 후보 소개와 연설, 선거권자 확인 등에 관한 공청회를 내일 4반 구역 어린이 놀이터에서 여는 것을 확정하고, 동장으로서 공식 참석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변사또측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이 공식 문서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직인과 서명이 없다고 딴지를 겁니다.

3시간쯤 후, 1통장 대리인은 동사무소 공문서 정식 용지에 직인과 서명이 찍힌 문서를 다시 하나 올립니다.

'4반 선거 관련하여, ㅇㅇㅇ을 선거 관리인으로 정식 임명하며, 누구도 선거 관리인의 선거 진행을 방해해서는 안됨'이라는 내용입니다.

인니의 느린 행정처리 속도로 봤을 때, 공식 문서가 이렇게 빨리 나왔다는 건 1통장이 어지간히 빡쳤다는 뜻입니다.

1통장이 동장에게 공문서 발급을 부탁하면서 뭐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을지 뻔합니다.

그리고, 동장도 빡쳤겠지요.

내일 공청회 개최하고 자기도 참석하겠다는 내용이라 굳이 진위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문서인데 직인과 서명을 요구했으니, 자기 말 못믿겠다고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이제 4반장 변사또는 동장에게 제대로 찍혔습니다.

 

다음 날(공청회 당일),

1통1반장의 글이 단톡방에 올라옵니다.

- 1반장

"어젯밤, 4반장과 주민 몇 명이 제 집에 찾아왔습니다. 4반 선거에 대해 조언을 청한다면서요. 전 이미 통장으로부터 선거 관련해서 일체 관여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4반장은 저와 가깝게 지내는 4반 주민들의 주민 등록이 어디인지를 자꾸 캐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돌려 보냈습니다."

- 4반 주민 C (아마도 4반장 하수인인듯)

"1반장님. 이곳은 4반 단톡방입니다. 4반 일에 끼어들지 마시길 바랍니다."

- 4반장 변사또

"1반장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만, 전 현 4반 반장으로서 주민들의 안전을 지켜야 합니다. 1반장님의 생각은 본인 자유지만, 4반의 안전을 위한 내부 일에 지나친 억측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갑자기 변사또 부인이 등판합니다.

글과 함께 1통 단톡방에 있는 1통장의 코멘트 캡쳐 사진을 올렸습니다.

선거 강행과 후보 2인에 1통장이 관여했다는 뉘앙스의 글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사실을 모르는 주민은 없습니다.

외국인인 저조차도 1통장이 4반장을 예전부터 엄청 싫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변사또 부인

"끝까지 참으려 했습니다만, 결국 몇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1통과 4반의 발전을 위해 그동안 동사무소와 군청에 보낸 의견들이 A4 용지 두 팩 분량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로 현 4반장(남편)을 내쫓고 거만하고 거친 인간을 4반의 반장으로 앉혔네요. 전 이 곳에 자택을 소유하고 거주하고 있는 진짜 주민으로서, 그런 거친 인간이 4반의 반장이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누가 지금 울겠습니까. 오직 반장(자기 남편)만 웁니다. 난 이미 남편이 반장 일 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기억하세요. 누가 됐든 주민들을 간섭하고 억압한다면, 난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겁니다."

"주민 여러분, 의견을 남겨 주세요.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시민입니다. 빽이나 줄로 선거에 당선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번 후보인 나온 이몽룡씨, 성춘향씨는 예전에 후보 추천 됐을 때 일이 바빠서 못한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한가하신가 보네요. 1통장님도 통장직 안한다고 했다가 되셨습니다. 웃기네요. 안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결국 자리를 꿰차고요."

4번 스크롤 내릴 분량의 글을 쏟아 냈는데, 엄청 격앙된 말투라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ㅎ

 

공청회 다음날, 집집마다 방문하는 형식으로 선거가 진행됐습니다.

제 집에도 찾아왔지만, 전 선거권이 없지요. ㅎㅎ

그날 오후 3시, 1통장 대리인은 4반 단톡방에 선거 결과 발표를 올렸습니다. (고작 반장 투표인데 반나절이면 충분하지요.)

1번 이몽룡씨 36표, 2번 성춘향씨 6표로 이몽룡씨가 당선됐습니다.

정당과 이념이 별 상관 없는 투표인 경우, 잘 모르겠으면 대부분 1번을 찍기 마련이죠.

 

선거 1주일 후, 이제 전 반장이 된 변사또는 단톡방에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전 반장으로서 저는 우리 4반의 발전을 어쩌고... 전 반장으로서 저는 새로이 반장에 당선된 이몽룡씨가 잘해나가길 저쩌고..."

문장마다 '전 반장으로서 저는...' 그 비장한 권위주의가 아주 가관도 아니네요. ㅋㅋ

특히 웃겼던 부분은, "앞으로 4반 관련 일은 더이상 제게 오지 마시고, 신임 반장에게 가시길 바랍니다"라는 부분입니다.

그가 반장으로 있는 동안, 부재중인 때가 훨씬 많아서 주민들은 대부분 통장을 찾아 갔거든요. 통장도 그래서 4반장에게 빡쳤고요.

 

 

이제 그 거만하고 돈 밝히던 전임 반장을 다시 볼 일 없으니 후련합니다.

실거주 증명서를 딱 1주일만 늦게 발급했으면 생돈 10만 루피아 나갈 일 없었다는 아쉬움 정도는 그냥 웃으며 넘어 가죠 뭐. ㅎㅎ

 

선거 후 두 달이 지났습니다.

전임 반장은 조용합니다. 원래 반장이었던 때도 없는 적이 많았으니 딱히 변화라고 할 것도 없네요.

신임 반장이 4반 구역을 자전거로, 혹은 도보로 산책하듯 돌아다니는 모습을 종종 봤습니다.

이제 갓 두 달이라 평가하긴 이르지만, 전임 반장보다는 훨씬 나은 거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