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도로를 다니다 보면 간혹 이런 걸 볼 수 있습니다.
마을 입구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인니어로는 가뿌라 깜뿡 Gapura Kampung 이라고 합니다. (혹은 가뿌라 람뿡 Rampung)
원래 가뿌라는 발리 힌두식 대문을 뜻합니다.
깜뿡은 마을, 시골, 고향이라는 뜻이고요.
재미있는 건 태국어, 필리핀어에도 캄퐁 Kampoeng 이라는 단어가 있으며 동일한 의미입니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의 모체인 멀라유어 Bahasa Melayu 가 원래 동남아 해상 무역 시대 당시 쓰였던 공용어였기 때문입니다.
동남아 국가 언어들의 유사성은 꽤 흥미롭니다.
가령 인니어 asin은 '짜다'인데, 필리핀 따갈로그어로는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anak'이라는 단어는 인니어, 말레이어, 필리핀어 모두 '아이,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이 주제로 포스팅을 해볼까 합니다.
가뿌라 깜뿡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lahatonline.com>
<사진 출처 : https://malintangpos.co.id>
마을 입구를 알릴 목적으로 세우는 가뿌라 깜뿡입니다.
이런 경우 모양이 점잖고 튼튼하게 만듭니다.
마을 구역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큰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인니는 과적 트럭이 많고, 도로 파손의 주요 원인이라 못들어오게 하는 곳이 흔합니다.
도로가 파손되면 마을 주민들이 불편해지고, 관청의 보수 공사를 받으려면 몇 년이 걸리기 때문에, 기다리다 못해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보수를 해야 하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 https://www.gatra.com>
요런 것들은 인니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기 세우는 겁니다.
하지만, 철거하지 않고 계속 남겨두기 때문에, 마을 입구 표지라는 기능은 마찬가지입니다.
<사진 출처 : https://borobudurnews.com>
부담스럽게 고퀄리티도 있습니다.
지역 관청에서 경진대회를 열기도 하는데, 그 수상 작품입니다.
요것도 롬복 남부 작은 어촌 마을에서도 본 건데, 소박하네요.
<사진 출처 : https://penanegeri.com>
이건 파푸아 뉴기니와의 국경 표지 용도로 세운 겁니다.
사진 포즈가 상당히 작위적입니다. ㅎㅎ
가뿌라 깜뿡은 보통 마을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걷어 세웁니다.
독립기념의 경우 마을의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모금을 해서 세우는 일이 많은데, 돈 내고 안내고는 완전 자유입니다.
모금한 돈으로 재료를 사기도 하지만, 제작하면서 음료수나 먹을 것을 사먹기도 하니, 축제 놀이 비슷한 측면도 있습니다.
마을 표지 용도로 세우는 경우는 모금을 은근히 강요하는 면이 좀 있지만, 역시 강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주 가난한 형편도 아닌데 끝까지 기부를 거절하면 구두쇠라고 찍하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제는 아니예요. ㅋㅋ
순전히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인니에 가뿌라 깜뿡 풍습이 있는 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부족 마을식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플로레스 바자와에서 봤던 부족 마을 형태의 원형 (https://choon666.tistory.com/1173)
까라왕 지역 어느 농촌 마을. 마치 논 바다 가운데의 섬 같습니다. (https://choon666.tistory.com/)
한국은 각 지역 간 통하는 길을 놓고 사토팔달 연결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인니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마을에서 큰 길로 이어지는 진입로가 하나 밖에 없는 폐쇄적 구조의 마을이 많습니다.
딱히 시골만 그런 게 아니라 도시에도 많습니다.
찌까랑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지역 외국인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고급 사립학교 SPH는 고급 주택단지 안에 있습니다.
SPH와 학교 구역 북쪽에 붙어 있는 서민주택단지 사이에는 높은 담장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SPH만 그런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주택단지, 상업지구 등이 모두 '구역' 단위로 출입로가 하나 밖에 없는 폐쇄적 구조입니다.
그래서 불과 20m 거리지만, 큰 길을 빙 돌아 6km를 가야 합니다.
사람만 지날 수 있는 통로 조차도 없습니다.
어딘가 있을 개구멍으로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은 보입니다만, 경비에게 걸리면 도둑으로 몰려 심한 곤욕을 치를 겁니다.
서민 주택단지에 대한 배척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서민 주택단지 역시 출입로는 하나 뿐입니다.
인니는 '원래' 이렇습니다.
한국은 예전엔 지형상 어쩔 수 없는 농어촌 마을이나 그럴까, 그 외에는 이런 폐쇄적인 구조가 없었습니다.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지름길로 가려고 정문 후문을 통해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가는 게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산으로 가로막히면 터널을 뚫어서라도 서로 이으려고 했지요.
한남동, 성북동 등 갑부들 저택 모여 있는 동네라고 해서 일반인이 길 못지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최근 한국에는 자신들의 '마을'을 폐쇄적으로 운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걸 한국식 가뿌라 깜뿡이라고 해야 할까요?
뭐 치안이라는 이유가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저변에 타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배타성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의 한국이 인니 부락 문화를 표방한다는 건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기술은 발전해도 인간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은 모양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