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학연수 당시 장기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https://choon666.tistory.com/267)
인니 땅덩어리가 넓다 보니 전국일주는 엄두도 못내고, 자카르타에서 동쪽 방향으로 돈이나 시간 떨어질 때까지 가보자는 여행이었지요.
그런 여행이다 보니 어디서 며칠, 언제 뭐 타고 어디로... 라는 식으로 일정을 자세히 짜진 않았고, 대강 설렁설렁 포인트만 찍는 정도 였는데 여정의 종착지가 될 곳이라고 잠정적으로 생각한 곳이 플로레스 Flores 섬이었습니다.
당시 여행은 족자에서 브로모로 가는 장거리 버스에 진이 빠지고, 브로모에서 제대로 눈탱이 한 번 맞고, 다시 브로모에서 발리까지 가는 교통편도 뒤통수를 맞은 3연타에, 발리에서 뻗어 버렸지요.
덕분에 발리에서 추스리고, 한 발 짝 더 딛어 발리 옆 롬복 섬까지 가는 것으로 여행은 마무리 됐고요.
당시 전 여행을 마치고 자카르타로 돌아오면서, 롬복 다음 여정이었던 숨바와 Sumbawa 섬과 플로레스 섬은 언젠가 갈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니에 사는 한, 국내 여행인데 그리 어려울 것도 없겠다 싶었지요.
그 언젠가가 10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학생 때와는 달리 직장에 다니면서 짬짬이 다니기에 플로레스는 여정이 길어서 부담스러웠 거든요.
물론 가고 싶었던 끌리무뚜 Kelimutu 만 찍어서 보는 거라면 갈 수 있겠지만 그건 아까웠고요.
그 동안 갔던 여행지들을 돌이켜 보니 만만하게 갈만한 국내 여행지의 심리적 경계선이 딱 롬복까지였던 거죠.
게다가, 좀 돌다 보면 금방 다 돌아보게 될 줄 알았던 인니의 관광지들이 화수분처럼 계속 새로 추가되는 바람에 더 먼 곳까지 눈을 돌리지 못하게 됐고요.
그러던 중, 회사로부터 장기 휴가를 받게 되자,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플로레스였습니다.
제가 10년 만에 드디어 플로레스를 갈 수 있게 된 건, 일 없다고 가차없이 무급휴가를 통보하는 훌륭한 회사 덕분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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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메트릭스를 떠올리게 만든 복장의 현지인 아저씨
열대지방에서 왠 롱코트냐 싶겠지만, 무슬림 복식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스타일이다.
정시에 탑승 시작했고, 10분 만에 승객 모두 탑승했다.
'왠일로' 정시 출발을 하나 싶더니 활주로 이륙 순서가 밀려 20분 늦게 출발했다.
바띡 에어 Batik Air 는 사고 잦기로 유명한 인니 최대 저가 항공 라이언 에어의 고급 브랜드다.
좌석에 스크린이 달려 있고, 구글 번역체이긴 하지만 한글 메뉴도 있다.
메뉴만 한글이고, 영화는 한글 자막이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비행 2시간 반, 드디어 목적지인 라부안 바조 Labuan Bajo 상공에 접어 들었다.
착륙 중
이때만 해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찍었는데, 나중에 저 길들을 직접 지나게 된다.
라부안 바조 공항은 시골 공항 치고는 규모도 크고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코모도 투어로 유명한 곳답게 코모도 도마뱀 사진도 뙇~
인니 정부가 제 2의 발리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한 10대 관광지 중 하나라서 나랏돈 좀 쏟아 부었나 보다.
플로레스로 가는 항공편도 예전엔 마우메레 Maumere 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젠 라부안 바조로 가는 게 더 많다.
그 때문에 저렴한 항공편도 라부안 바조 쪽이 많아서, 나도 이번 여행의 첫 출발지로 여길 선택했다.
뭐 그래봐야 활주로를 걸어서 공항 청사를 가야 한다는 점은 다른 시골 공항이나 다름 없다.
공항 건물 밖으로 나서면, 출구 앞에 바글바글 모여 기다리고 있던 개인 택시업자들의 굶주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차라리 금발 미녀들이었다면... 음 그건 그거대로 무섭겠다.
어차피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무조건 5만 루피아로 정해져있으니, 흥정한다고 힘 뺄 필요 없다.
아무나 제일 먼저 말 걸고 눈 마주친 택시업자에게 고개 끄덕이고 따라가면 된다.
어지간히 떨어진 곳 아니라면, 시내 어디든 걸어서 30분 안짝이니, 젊은 튼튼이들이라면 시간과 돈을 몸으로 떼우는 것도 선택지로 생각해 볼만하다.
30분에 4천원 짜리 알바라고 생각하면 꽤 짭짤하겠다.
개인 택시업자를 따라 공항 바깥까지 걸어 나왔다.
개인 택시업자들의 차가 도로변에 줄줄이 주차되어 있다.
공항 앞은 소박한 시골 거리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다들 휑하니 시내로 가버리기 때문에, 이런 지역의 공항 앞은 상권으로서의 실속이 없다.
아마도 택시업자들에게는 투어를 중개해서 수수료 받는 수수료의 수입 비중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내가 탄 택시의 업자도 5분 거리의 숙소 길을 살짝 돌아가면서 (그래봐야 2분 더 걸림) 코모도 투어 떡밥을 투척했지만, 생각해보겠다며 거절했다.
숙소에서 차분히 알아보고, 조건이 그닥 맞지 않으면 시내의 투어 여행사에서 흥정할 생각이다.
라부안 바조 2박 3일 동안 호텔 까수와리 Hotel Kasuwari 라는 곳에 묵었다.
아고다를 통해 에어컨 방 2박 59만 루피아로 예약했다.
비수기인데다 오픈한지 얼마 안되고 중심지에서 약간 벗어난 구역에 있어서, 라부안 바조 지역 시세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중심지에서 좀 벗어나 있다지만, 라부안 바조 시내가 워낙 콩만 해서 중심지까지 걸어서 10분이다.
라부안 바조에 오는 관광객들은 코모도 관광하러 비행기 타고 온 돈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숙소 시세가 인니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다.
3층 뷰를 기대했는데 그다지 좋지도 않고, 바람도 별로 없어서 더웠다.
가뜩이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점도 불편해서 1층 객실을 선택했다.
오토바이를 빌려주면서 헬멧을 꼭 쓰고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가끔 길 막고 불시 검문을 하는데, 돈 뜯을 목적으로 하는 거라 짤 없이 무조건 벌금 50만 루피아랜다.
재미있는 건, 그 얘기를 해주는 호텔 매니저의 표정과 말투에서 경찰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인니 경찰들 부패한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동안 가봤던 모든 지역들의 주민들은 그냥 '원래 그렇다는 듯' 만성이 되어 딱히 밉고 자시고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는데, 이 지역은 좀 다른가 보다.
파란색 원이 라부안 바조의 메인 도로라고 할 수 있는데, 반시계방향으로 일방통행이다.
중심가쪽은 그나마 눈치껏 역주행 하기도 하지만, 언덕길 쪽은 굽이길이 많아서 그런지 역주행 하는 사람을 본 적 없다.
여행사나 레스토랑, 기념품점 등은 중심가에 몰려 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길은 오후 6시부터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시푸드를 파는 노점상들이 주욱 늘어선 야시장이 된다. (차량 우회로는 물론 따로 있다.)
언덕길에서 내려다 본 라부안 바조 시내와 항구 풍경
라부안 바조의 라부안 Labuan 은 '항구'라는 뜻이다. (현대 인니어로는 쁠라부한 pelabuhan)
바조는... 모르니까 좀 바조!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지, 호텔로 보이는 건물이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
라부안 바조에서 뷰와 접근성이 가장 좋은 장소다.
언덕길 옆 뷰 포인트
저녁이 되면 길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앉아 선셋 풍경을 감상하는 현지인들이 많다.
도로가 좁기 때문에, 자동차로 관광하는 여행객은 잠깐 내려서 보는 정도만 가능하다.
느긋하게 앉아서 경치를 즐기는 건 오토바이나 도보 여행자들의 특권이다.
도로 끝 저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한참 건축중인 건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였다.
관광지로 육성하면서 외부 자본이 몰리고 있을 거다.
자본 없는 토박이 현지인들은 몇 푼 받고 외각으로 옮겨갈테고.
공평한 기회가 자본주의 체제의 장점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민주주의의 목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신분과 상관 없이 누구나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말장난 때문에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 말장난 뒤에는 '하지만 그 기회가 공평하지는 않다'라는 부분이 빠졌다.
민주주의는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공평하게 1인당 1표를 행사한다.
시내를 벗어나자 마자, 인가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이 펼쳐진다.
아니, 인가 하나 보이지 않는 길에 접어 들었으니 시내를 벗어난 건가?
시내를 벗어나 3분 정도 달리자 길 옆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공터에서 바라본 라부안 바조 방향
사진 좌측의 큰 건물이 그 유명한 아야나 코모도 Ayana Komodo 리조트다.
1박에 30만원 정도 하는 가격으로, 쓰는 돈보다 굴러 들어오는 돈이 더 많아 쓰기 힘들어 주체를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돈지랄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