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가 좀 안됐는데 야시장 길이 이미 폐쇄됐다.
라부안 바조의 중심지 풍경
건물 사이 작은 틈으로 햇빛이 지난다.
라부안 바조는 서향이라 선셋 보기 좋은 항구다.
일방통행 덕분에 걸어서 2분 거리를 오토바이로 10분을 돌아 감
원래는 라 쿠치나 La Cucina 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려고 했는데, 한창 내부 공사중이다. =_=
대안이었던 메디테라니오 Mediterraneo 레스토랑은 이미 지나쳤는데, 문제는 이 길이 일방통행이라는 거.
이곳 주민이라면 길가로 붙어서 슬금슬금 역주행을 하겠지만, 외지인이 그러면 무슨 시비가 붙을지 모르니 규칙을 지키는 게 좋다.
그냥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우고 걸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뭐 이렇게 언덕길에서 선셋도 보고 좋지 않나.
겸사겸사 경치도 감상할 겸, 10분 정도 더 드라이브 하는 셈 치는 것도 좋다.
이 거 없었으면 아마 오토바이 세워 두고 걸어갔을 거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인니에서는 지중해를 뜻하는 메디테라니아 mediterrania 라는 상호를 쓰는 곳은 고급, 럭셔리로 통한다.
이를테면, 시골 옷가게 이름이 파리일 수도 있고, 콩만한 식당 이름이 도쿄일 수도 있지만, 메디테라니아를 붙이는 곳은 적어도 나는 본 적 없다.
시골의 허름한 호텔이라도, 그 일대에서 그나마 가장 고급인 곳 정도는 되어야 메디테라니아라는 상호가 붙어 있다.
음식 가격대는 인니 물가에 비하면 매우매우 비싼 편이다.
기독교가 강세인 지방답게 돼지고기를 재료로 쓰는 메뉴들이 있다.
음식이 비싼 편인 것에 비해 주류의 가격대는 보통이다.
이 역시 기독교 강세 지방이라 주류 취급에 제한이 심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인니에서 주류 가격대가 비싼지 아닌지 판단하려면, 빈땅 Bintang 맥주를 기준으로 하면 참고가 된다.
빈땅 맥주 큰 병 5만 루피아를 보통 수준이라고 잡으면 된다.
비싼 곳은 빈땅 맥주 작은 병을 5만 루피아 받기도 하고, 더럽게 비싼 곳은 아예 빈땅 맥주는 없고 하이네켄 작은 병을 8~9만 루피아씩 받아 쳐먹는다.
개더럽게 비싼 곳은 오히려 빈땅 맥주 작은 병 10병 정도 공짜로 준다. 대신 가짜 양주 값과 룸차지와 아가씨 봉사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항구 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좌석이 늘어서 있는데... 그 앞으로 나무들이 풍경을 다 가리고 있다는 게 문제.
게다가 면한 곳이 하필 컨테이너 야적장이라 뷰가 그리 좋진 않다.
레스토랑 내부 절반은 의자에 앉는 테이블 구역이고, 나머지 절반은 바닥에 눕듯이 앉을 수 있는 서퍼 체어 구역이다.
대접 같은 잔에 나온 샹그리아
비싼 식당답게 식전 빵이 나오는데, 그저 그랬다.
빵은 별 개성이 없었고, 간 토마토와 오일(올리브 오일이 아닌 거 같음)이 재료인 소스도 맛이 좀 괴상했다.
크리스피 치킨은 닭고기와 양파를 잘게 다져 섞어서 튀긴 음식이었다.
그럭저럭 괜찮긴 했지만, 고기 씹는 맛이 부족해서 감점.
감자 튀김은 아주 맛있었다.
포대로 파는 미제 냉동감자는 아닌 것 같다. (하긴, 유통비가 더 비싸겠지.)
이후 플로레스 여기저기 다니면서 먹어 본 감자튀김 거의 대부분이 맛있었다.
디아폴라 Diavola 비자
어어어어엄청나게 맛있다!
지금껏 먹어 본 피자 중에 최고로 맛있다!!
이태리 본토에서 먹어본 (그래봐야 뭐 맛집 가서 먹은 건 아니지만 ㅋㅋ) 피자를 기준으로, 그에 근접하게 맛있는 피자는 종종 먹어 봤지만, 그보다 더 맛있는 피자는 이게 처음이다.
메뉴판에는 매운 맛 표시가 있었지만, 한국인 입맛에는 그냥 살짝 매운 정도다.
좋은 치즈를 썼는지 풍미가 좋았다.
특히 도우가 끝내줬다. 지나치게 얇지 않고 적당한 두께라 씹는 맛이 좋았고, 겉의 바삭함과 안의 쫄깃함이 공존했다.
게다가 누룽지 향이 감돌아서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은 허기가 돌았다.
각자 취향이 다른 법이라 추천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이 피자는 강추한다.
입맛에 따라 그렇게까지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맛 없다고 느낄리는 없다고 장담한다.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언덕을 두고 앞뒤로 뚫린 길다란 구조의 건물이라, 바람이 끊임없이 솔솔 지나가서 식사하는 내내 쾌적했다.
음악 볼륨이나 다른 손님들의 소음도 적당해서, 일행끼리 대화하기 편안한 분위기다.
모기가 많은 편이었는데, 도시 문물을 잘 모르는 시골 모기들이라 그런지 바르고 간 모기 기피제 약발이 잘 받았다.
특이하게도 메뉴판 가격이 세금 포함 가격이었다.
(인니는 보편적으로 메뉴판 가격에 부가세 10%, 서비스 차지 5%를 따로 가산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여기 가격이 그리 비싼 건 아니다.
저녁 7시 반 경의 중심가 풍경
비수기라 그런지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다.
아직 시간도 이르고 먹을 배가 아직 좀 남은지라, 일방통행 길을 다시 한 바퀴 돌아 시푸드를 파는 노점상이 늘어선 야시장에 가보기로 한다.
마침 꽉찬 보름달, 풀문이 떠올랐다.
거짓말 좀 보태서 보름달이 주먹만 하게 보였다.
라부안 바조 언덕에서 다시 또 한 컷
낮에 한 번, 선셋 때 한 번, 그리고 밤에 다시 한 번, 오늘만 세 번째 지나간다. ㅋㅋ
야시장 시스템이 유니크했다.
입구 한 켠(화살표 표시)과 거리 군데군데에 바우처를 파는 데스크가 있다.
데스크에서 바우처를 구입해서, 그 바우처로 야시장 음식 값을 계산한다.
남은 바우처 금액은 데스크에 도로 가져가면 현금으로 환불해준다.
아마 국유지를 제공하는 대신 세금 포탈을 막으려는 목적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시내 한복판에 세무서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라부안 바조 지방 정부가 세금 징수에 공을 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야시장은 일직선으로 주욱 늘어서 있으며, 200m가 조금 안된다.
노점마다 해산물을 앞에 늘어놨다.
어차피 조리법은 굽거나 튀기거나 둘 중 하나고, 양념맛도 고만고만하니, 늘어놓은 해산물 종류나 상태를 보고 어느 곳에서 먹을지 고르는 편이 낫다.
야시장 끄트머리에 깔끔한 외관의 공중 화장실도 있다. (내부 위생상태가 어떨지는 보장 못함.)
정부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그런가 보다.
뭐 대단하냐 싶겠지만, 인니는 대체적으로 공중 화장실이 없거나, 있어도 상태가 매우 허름하다.
심지어 천막으로 대충 둘러친 곳도 있다.
야시장 맨 끝에 있는 건물 안 시장에서는 말린 생선을 판다.
큰 오징어가 눈길을 끄는 노점에 자리를 잡았다.
인니 오징어는 보통 사진 속 작은 오징어 정도 크기고, 큰 오징어는 드물다.
이미 저녁을 먹어서 배가 불렀기 때문에 작은 오징어로 골랐다.
5~6마리를 꿴 묶음 단위로 파는데, 한 묶음에 8만 루피아 부른다.
내 감각에 4만 루피아 정도면 약간 넉넉한 가격이라고 생각했지만, 흥정은 하지 않았다.
대신 바싹 익혀달라고 두 번 강조해서 부탁했다.
야시장 분위기를 보아 상한 걸 팔 리는 없어 보였지만, 이미 죽은 해산물이라 안전을 기하는 편이 나았다.
흥정이 성격상 안맞는지 어색하기만 하고, 성공해도 재미있기 보다는 찜찜하다.
그리고 뜨내기와의 흥정은 상인이 100% 이기는 게임이라는 걸 안다.
계속 보고 오랫동안 거래할 가능성이 있는 주민이라면 모를까, 한 번 오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게 확실한 뜨내기에게 기대 이익 이하를 감수하고 팔 상인은 없다.
무리해서 싸게 깎았는데 거래가 성사됐다면, 상인 머릿속에서 이미 상태 안좋은 물건을 판다던가, 같이 딸려서 주어할 걸 안준다던가 하는 계산이 끝났을 거다.
시골 무지렁이라 배운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잘못된 판단이 곧 생계의 위협과 직결되는 입장인 사람에게는 절대 멍청할 수가 없는 절박함이 있다.
재미로 깎는 관광객과는 마음가짐부터가 다르다.
흥정을 하지 않는 대신, 너무 비싸다 싶으면 그냥 안사고 만다.
어차피 관광지에서 사고 싶어지는 것들은 안산다고 큰일 날 일 없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소비 행위가 그렇지만, 특히나 관광지에서의 소비는 실제로 필요해서라기 보다, 소유욕으로 인해 발생한 결핍감을 채우려는 충동이 본질인 허상이다.
그 걸 이해한다면, 갖고 싶은 물건 못갖아서 느껴지는 불행한 감정 역시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한 허상일 뿐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다.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부르는 상인은 이미 상인이 아니라 사기꾼이고, 그런 가격에 동의하는 건 그냥 바보짓일 뿐이다.
하지만 '적당히' 비싸게 부르는 상인이라면, 흥정을 하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다.
사기꾼은 희생자에게 가책을 느끼지 않지만, 정직한 상인은 손님에게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뭐라도 잘해주려는 마음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순순히 동의하면서도, '그 가격 비싸다는 거 다 알아요'라는 내색을 보이면 효과가 더 좋다)
노점에서는 맥주를 팔지 않기 때문에, 길 건너 편의점에서 직접 사와야 한다.(물론 바우처가 아니라 현금으로 계산해야 한다.)
이슬람이 약한 지역이다 보니, 편의점에서 대놓고 맥주를 진열하고 판다.
이슬람 강세 지역은 맥주를 대형마트에서만 팔고, 소규모 상점에서는 판매가 금지됐다.
심지어 찌레본 Cirebon 같이 이슬람이 아주 강성인 지역은 5성급 호텔을 제외하고는 아예 술을 취급하지 못한다.
밝은 빛을 뿌리는 풀문이 정취를 더한다.
산등성이에 보이는 건물은 챠오 호텔 Ciao Hotel 인데, 전망도 좋고 숙박비도 30만 루피아 정도로 그리 비싸진 않지만 이용객 평이 별로 좋지 않다.
야외 노점에 앉아 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인니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해방감이다.
역시 적당한 제한과 결핍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드디어 나온 오징어 구이 Cumi Bakar
오징어가 워낙 잘아서 그런지, 손질해서 나온 요리의 양이 조촐하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밥과 야채가 같이 딸려 나왔다.
흥정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 들인 보람이 있다.
만약 깎았다면 밥과 야채를 따로 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오징어 구이는 외양을 봤을 때 연상되는 딱 그 맛인데, 불맛이 제법 잘 들어서 괜찮았다.
같이 나온 삼발 sambal 이 정말 맛있었다.
단맛이 일절 없는 매운 맛인데, 오징어 구이에 바른 케찹 마니스 소스의 달달한 맛과 잘 어울렸다.
달달한 맛에 섞여 입에서는 그리 맵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서너 번 먹고 나서야 뱃속에서 불이 올라온다.
매운 맛 좋아하지만 심하게 매운 건 잘 못먹는 내 입맛에 그렇고, '이게 사람이 먹는 음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점점 정도가 심해지는 한국의 매운 음식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입맛에 딱 맞을듯 하다.
밤 9시가 좀 넘은 라부안 바조 중심가 풍경
레스토랑 말고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숙소에 도착해 씻고 누우니 밤 10시다.
뼈마디가 쑤신다.
아침에 일어나, 자카르타 공항 가서, 비행기 타고 라부안 바조 와서, 숙소에 짐 풀고, 오토바이로 한 바퀴 돌고, 저녁 먹고, 야시장 돌아 보고... 뼈마디가 쑤실만 한 일정이었다.
내일 코모도 1일 투어는 대략 11시간 정도의 일정이다.
숙소에서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5시 반이니,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오늘 보니 햇빛과 더위가 만만치 않던데, 내일 하루 종일 버틸 생각을 하니 죽었구나 싶다.
그래도 7시간은 잘 수 있으니 그럭저럭 버틸 순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