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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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이야기 V] 2. 마음이 척박한 나라

명랑쾌활 2020. 8. 10. 07:59

새 직장의 파견 근무처는 빈말로라도 좋은 곳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못할 곳이었다.

어지간한 인성 밑바닥은 다 봤다고 생각한 내 자만을 훌륭하게 박살내주었다.

혼자 파견 나왔으니 아군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 적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여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어디 쪼그려 앉아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 때면,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길지, 무슨 욕을 먹거나 봉변을 당할지 우울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임신했는지 배가 빵빵하다.

사방이 논밭으로 둘러 쌓여, 가장 가까운 민가가 200m 떨어진 이 공장까지 와서 자리 잡기까지 나름 사연이 있을 게다.

뭐 먹을 거라도 주려나 온 거겠지만, 위로라도 해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웃음이 나왔다.

힘든 시기가 계속 되다 보니 동물에게 내 좋을대로 감정을 이입할 정도로 마음이 약해진 자신이 웃겼다.


다시 한 달을 버텨 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고, 여러가지 삶의 방식들을 봤다.

고양이도 그사이 무사히 출산을 한 모양이다.

인니 대부분의 공장들과 달리 이 곳은 척박한 곳이다.

현지를 이해할 마음이 없는 한국 직원들과 적대심 가득한 현지인 직원들 사이에 불신의 찬바람이 쌩쌩 부는 곳이다.

공장 내 한국인 기숙사에서 풀어 키운 덩치 큰 개는 고양이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였고, 여느 현지인들과는 달리 이 곳 직원들은 고양이에게 무심했다.

이 척박한 나라에 새끼를 낳아, 이끌어 다니며 주변 환경을 가르쳐주고 있다.

새끼는 주의가 산만한지, 어미를 따라가다가도 자꾸 다른 곳을 새곤 해서, 어미가 갔던 걸음을 되돌리길 수 차례 반복했다.


두 마리가 살아 남았나 보다.

공장 한 구석에서 두 새끼에게 젖을 주고 있다.


일주일 쯤 후, 출근을 하는데 새끼 고양이가 죽어 있는 게 눈에 뜨였다.

예전에 어미 고양이와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 근처다.

흔적으로 보아 뭔가에 물려 죽은 거 같았다.

어미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에 피웠지만, 도로 저만치 가서 다시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차갑게 굳은 새끼 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새끼 고양이는 지구에 있었던 채 한 달이 안되는 시간 동안 뭘 누리고 갔을까.

평생 본 세상이라곤 시골 한국 공장 안 척박한 이 곳이 전부다.


아침 청소를 하려고 돌아 다니던 청소 파트 직원이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무심하게 빗자루로 쓰레받기에 굴려 넣어 어디론가 가져 갔다.

어디 적당한 곳에 묻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런 곳은 별의별 소문이 금새 돌고 돌아 퍼진다.

헛점이 없어도 만들어서 깨는 마당에, 좆도 아닌 하청 회사 한국인이 이상한 거 시켰다는 소문이 직원들 심심풀이 가십으로 돌고 돌아 이 회사 한국인 관리자 귀까지 들어가면 어떤 식으로 내게 돌아올 지 모를 일이다.


이 녀석이 새끼 고양이를 물어 죽였을 거다.

이 회사 기숙사에서 키우는 개인데,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예민한 편이었다.


그 날 오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를 발견한 어미 고양이가 다가왔다.

수척하고 털도 지저분하다.

나머지 새끼 한 마리는 어떻게 됐을까.

기숙사 음식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점심 먹고 남아 냉장고에 보관했던 닭고기 조각과 어묵 무침을 받아 고양이에게 주었다.

소문 좀 퍼지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겁지겁 먹는 고양이를 두고, 다시 일하러 갔다.

그 날 그렇게 본 게 그 고양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시 3개월 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간 외주 계약을 종료하기로 결정됐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파견 철수하라는 통보가 왔다.

이 척박한 곳을 벗어 날 수 있다.

기뻤다.


철수 통보 후 며칠 간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적대적 관계에 가까웠기 때문에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매일 캄캄해져서야 집에 도착했다.

최종 쌍방 실사 전 날, 실사 준비를 마치고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는데 문득 젖소가 눈에 뜨였다.

집에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면 꼬리를 살랑 거리면서 오던 녀석인데, 웅크리고 누워 고개만 들어 물끄러미 쳐다 보기만 한다.

어째 좀 힘이 없어 보였지만, 굳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 가까이 가기 귀찮았다.

피곤했다. 마음이.

사진만 한 장 찍고 집으로 들어갔다.


금요일, 토요일 이틀 간의 쌍방 실사는 그럭저럭 원만하게 마쳤다.

이제 더 이상 그 회사로 출근할 일은 없다.

이번 주말 지나고 나면 당분간 자카르타 오피스로 출근해야 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근처 지역에는 근무처가 없기 때문에 이 집을 떠나 이사가게 될 확률이 크다.


다음 날 아침, 고양이 밥을 주러 밖에 나와 보니 바깥문 사이에 젖소가 아무 움직임 없이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평소 젖소가 이용하는 출입문이다.


땅에 코를 박은 채로 엎어져 차갑게 굳어 있었다.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안간힘을 써서 겨우 안으로 반쯤 들어와 힘이 떨어져 멈춘 것 같았다.

따로 외상은 없었고, 피를 토한 흔적으로 보아 뭔가 잘못 먹고 크게 탈이 난 게 아닐까 싶다.

사흘 전, 퇴근하면서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이미 병이 들었던 모양이다.


옷으로 잘 싸서 집 앞마당 한 켠에 묻어 주었다.


지구에 약 8개월을 다녀 갔고, 그 중 6개월하고 2일을 우리와 같이 있었다.

도회지인 찌까랑에서 만나 50km 떨어진, 아무 연고 없는 시골에 와 지내다 떠났다.


지구에 있는 동안 젖소는 뭘 누리고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