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식사를 마치고 숙소 방 타일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열을 식힌다.
숙소 지대가 좀 높기 때문에, 문만 열어 놓으면 방바닥에 누워서도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다.
대여를 부탁한 오토바이는 이미 숙소 앞마당에 세워져 있었다.
산간 지역인 루뗑 Ruteng 과 바자와 Bajawa 에서도 매일 낮시간에 비가 한 차례 왔었는데, 이곳도 그럴 거 같았다.
오늘은 날씨가 꽤 좋은 편이고, 시간도 이미 4시에 가까워져 그리 덥지 않을 거다.
일반 승합차로 편하게 와서 컨디션도 그리 나쁘지 않다.
'일단 가봐서 너무 더우면 내일 다시 가면 되고, 경치 좋으면 내일 또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이 간단한 결론을 내리느라 10분을 뒹굴 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지도상으로 보면 길이 빙 둘러서 돌아가는 지역을 지나게 되는데 와뚤라까 Watulaka 마을이다.
끌리무뚜 산에서 흘러 오는 풍부한 물로 형성된 계단식 논밭과 시골 마을이 어우러진 풍경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이 곳엔 노천 온천도 있다.
와뚤라까 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굽이굽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구름이 점점 낮아지다가...
급기야 구름을 뚫고 지나기도 한다.
안개가 아니다. 저 구름을 뚫고 지나면...
이렇게 다시 맑은 날씨다.
한국이라면 서낭당(성황당)이었을 멋진 나무도 우뚝 서있다.
경치 좋은 지점엔 어김 없이 건물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비어 있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해서 구글 스트릿뷰 사진으로 대신한다. 2016년도 사진이고 지금은 도로폭이 3배 정도 더 넓다.)
오후 4시 반 경에 매표소에 도착했다.
천천히 매표소 옆에 오토바이를 세웠는데, 안에 사람이 없다.
매표소 옆엔 조그만 마을이 있었는데, 그 중 매표소에 가장 가까운 집에서 유니폼을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웃으면서 종종종 뛰어 온다.
씨익 웃으며 농담조로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퇴근하셨어요?"
아주머니도 멋적게 웃으며 대답한다.
"이 시간엔 사람이 거의 안와요."
"저런, 아직 밝은데요. 산정상에 구름이 많아서 경치가 안보이기라도 하나 봐요?"
"아뇨, 아직 날씨 좋을 거예요. 잠시만요."
아주머니는 태블릿을 꺼내어 몇 번 찍더니, 내게 보여줬다.
산 정상에 설치된 CCTV와 접속된 화면이 보인다.
오오... 명색이 인니 정부가 미는 10대 관광지라 확실히 다르다.
"몇 시까지는 나와야 하죠? 해지면 위험할 거 같은데요."
"6시 전에만 나오면 되요."
"그 이후에는 출입금지인가요?"
"딱히 금지는 아닌데, 마을 사람들 아니면 되도록 권하지 않아요. 깜깜하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 가서 보고 좋으면 내일 또 올게요."
"내일도 꼭 오세요. 일출이 정말 멋져요."
입장료를 지불하고 매표소를 지났다.
사실 아주머니에게 말을 붙인 건 현지인 요금으로 지불하고 싶다는 속셈도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만약 외국인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내가 외국인인가 하는 의문 자체를 품지 않도록 인니어로 계속 말을 한 거다.
덕분에 아주머니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고 현지인 요금 티켓을 내밀었다.
꾀죄죄한 차림에 노릇노릇 탄 얼굴, 면도를 안해서 지저분한 수염, 오토바이, 그리고 나름 유창한 인니어 덕분이다.
예전엔 인니 지방 지역을 여행할 적에 말레이시아인이나 싱가폴인이라는 오해를 종종 받았다.
아마도 내 인니어 구사가 아직까지는 어색한 구석이 있어서 그랬을 거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은 인니어가 통한다. 발음과 표현 단어가 약간 다르지만, 의사소통은 큰 문제 없다.)
지금은 발음이 거의 현지화가 되었는지 대부분 '서울(?)말씨를 쓰는 자카르타에 사는 중국계 인니인'이라고 오해한다. ㅋㅋ
매표소를 지나서도 주차장까지 다시 5~10분 가량 더 가야 한다.
이 구간은 도로 확장 공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주차장 도착
약도를 대략 파악하고...
길을 오른다.
2~3분 정도 계단을 오른다.
경사가 완만하고 디딤폭이 넓어 그리 힘들지 않다.
...물론 나는 힘들었다.
이 라틴어스러운 단어의 뜻은 뭔가... 사전을 찾아봤더니 '수목원'이랜다
계단을 다 오르면 보이는 동판
계단 다음은 평평한 산길이다.
이 정도 품을 들여 1,600 미터 높이의 화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니, 너무 좋다.
만든지 오래되어 보이는 전망대
불안해서 올라가보지 않았다.
딱히 저곳에서 본다고 특별할 경치도 없는데 왜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노점들도 다 철수했다.
저 앞에 끌리무뚜 세 호수 중 두 곳을 볼 수 있는 전망대 계단이 보인다.
드디어, 끌리무뚜 호수에 도착했다.
생각했던대로 멋진 경치였지만, 경치보다도 가보겠다 생각한지 거진 10년 만에 마침내 왔다는 감회가 더 크고 후련했다.
여러 생각이 드는 중 가장 큰 건 감사하다는 마음이었다.
여행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 시간, 건강,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길, 관리하는 사람들, 여행자 숙소, 마침 좋은 날씨, 분화하지 않고 기다려준 화산, 금성만큼 가깝지도 화성처럼 멀지도 않고 딱 적당한 위치에 있는 지구 등등 수없이 많은 것들이 맞아 떨어져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
노력으로 되는 몇 가지 요소와 노력과 상관 없는 나머지 대부분이 합쳐진 결과다.
난 참 운이 좋다.
운이 좋음에 감사한다.
이것으로 인니 여행의 한 단락을 끝마쳤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한 5년 정도면 인니의 멋진 곳들을 대충 돌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몰랐던 곳들이 여기저기 계속 튀어나오는 바람에 10년이 걸렸다.
물론 와까또비 Wakatobi 나 라자 암빳 Raja Ampat, 암본 Ambon, 뗴르나떼 Ternate 등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당분간 인니 국내 여행은 짬이 나면 가까운 곳을 다니고, 장거리 여행을 갈 기회가 되면 인근 동남아 국가를 돌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