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Flores Indonesia] 15/18. Kelimutu를 뒤로 하고

명랑쾌활 2019. 10. 28. 08:00

여기까지 왔으니 나머지 호수 한 곳을 보지 않을 수 없겠는데...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아까 운좋느니 감사한다느니 했던 아름다운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가고, '아 좆됐구나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마음의 간사함은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제법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화장실이 있으니, 내장이 짧은 사람도 걱정 없겠다.


이미 오후 4시 50분, 노점상도 철수해서 텅빈 길을 원숭이가 지나 다닌다.


원래는 이렇게 노점상이 있다.

세계 테마기행 촬영팀은 내가 온 다음 날 오전에 이곳에 온 것으로 보인다.


자막 내용은 여기서 먹을 거 사서 원숭이 줘도 된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먹을 거 주지 말라고 한다.

관광객이 주는 먹을 거에 원숭이들이 익숙해져서, 관광객이 안주면 빼앗아 먹게 되는 식으로 점점 난폭해지기 때문이다.


사탕 맛을 모르는 아이는 사탕을 탐내지 않는다.

탐욕은 결핍에서 비롯되고, 결핍은 앎에서 비롯된다.

부족함을 모르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만족이 아니다.

알게 되면 금새 깨져 버리는 불완전한 평온이다.

만족하는 삶을 살려면 자신이 느끼는 결핍이 실체에서 온 것인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것'과 '있으면 좋은 것'은 다르다.

'있으면 좋은 것'과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도 다르다.

세상 살면서 필요한 건 의외로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 '있으면 좋은 것'들이고, 그것만 해도 이미 끝도 없다.

하물며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들에까지 결핍을 느끼고 탐욕을 갖는다면, 만족하는 삶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저 계단이 에스컬레이터면 얼마나 좋을까...


계단 오르막 거의 끝부분 쯤에 밑의 전망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호수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그 뒤로 계단 경사가 더 급해진다.

시간이 촉박해서 급하게 올랐더니 힘들다.

계단 끝 정상은 포기하고, 마지막 호수가 보이는 곳까지만 오르기로 한다.

딱 2분만 더 오르면 정상이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어차피 구름이 둘러쳐 있어서 경치도 보이지 않을 거 같다.


마지막 호수는 그리 잘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 호수가 보이는 전망대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구름이 스르륵 지나가며...


금새 풍경을 덮는다.


오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덥기는 커녕 약간 쌀쌀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선했고, 날씨도 좋았다.

한 30분 정도만 더 일찍 와서 좀더 느긋하게 돌아봤으면 완벽했을 거 같다.


세계 테마기행 촬영팀은 내가 오른 다음 날 오전에 올라 왔는데 이렇게 됐다.

숙소 아주머니가 내게 요즘 날씨가 계속 좋으니 다음날 오전에 올라가라고 했는데, 그 말 들었으면 좀 빡쳤을듯.


내려가려는데 난간 너머로 원숭이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와, 공손한 자세로 앉아 구걸을 한다.


인터넷에 올라원 예전 끌리무뚜 사진 중에는 관광객들이 저 호수 가장자리까지 가서 찍은 것도 있었다.

지금은 지반이 약해서 무너지기 쉽다며 출입금지 팻말이 서있다.

그렇다고 해서 관리요원이 감시하고 있다가 호루라기 삑삑 불면서 완장질 하는 건 아니라서, 가고 싶다면 못갈 것도 없다.

스스로 책임만 지면 된다.


5시 반 쯤 주차장에 도착했다.

구름을 내려다 보며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올라 올 적과는 또 다른 풍취다.


도로 확장공사의 마무리가 덜 되어 산을 깎은 흔적이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다.

역시 인니는 마무리가 허술하다.

일단 개통은 했으니, 마무리는 세월아 네월아 언제 끝날지 모른다.

뭐 그래도 개통이라도 한 게 어딘가.


구름 사이로 저 멀리 인도양이 보인다.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집 앞에만 나와도 늘 그 풍경이 펼쳐저 있을 거다.

하지만 별로 부럽진 않다.


저녁 6시, 숙소 도착

끌리무뚜에서 내려오면서 몸이 다 식어서 한기가 살짝 들었다.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나오니 어느새 어둡다.


주인 아저씨와 잠시 얘기를 나눴다.

아저씨 말로는 끌리무뚜 길 확장공사는 약 8개월 정도 걸려서 2018년 12월에 개통됐다고 한다.

그 전에는 도로 폭이 좁아 차 한 대 지나면 오토바이도 멈춰서 길가로 붙여야 할 정도였댄다.

아마 매표소 지나 나왔던 산길 정도 폭이었던 모양이다.

끌리무뚜 비수기는 우기로 1~2월 즈음에 바닥을 찍었다가, 4월 즈음부터 점점 늘기 시작한다고 한다.

우기엔 보통 오후마다 비가 오는데, 최근 나흘 간은 비가 안왔었댄다.

아줌마는 일주일간 비가 안왔다고 했었다. ㅋㅋ


경험에서 나온 개인적인 생각인데, 인니인들은 시간에 관련된 기억이 한국인에 비해 부정확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한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가령, "기차가 언제 오느냐", "이 곳은 언제 생긴 거냐",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냐" 등등이 그렇다.

딱히 인니인들이 거짓말장이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시간 개념이 약해서 기억을 잘 못한다는 점과 잘 모르면서도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준다는 점이 겹쳐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시간 개념이 약할 만도 한 게, 계절 변화가 거의 없고, 기차나 버스, 비행기 등이 제 시간을 지키지 않고, 오토바이 한 대 넘어지는 경미한 교통 사고에도 그 거 구경하느라 서행하는 차량들 때문에 20~30분 밀리는 정체가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장 나 같은 경우도, 어디 여행 갔었던 게 언제였는지 같은 먼 일은 기억을 잘 하지 못한다.

한국 같으면 여행 갔을 때의 날씨와 풍경이 떠올리고, 4계절 바뀌는 1년 단위를 마디로 역산하면, 몇 년 전 몇 월 쯤에 갔었다는 게 금새 명료하게 기억나는데, 인니는 그야말로 년도와 월이라는 단순한 숫자로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떠올리기 어렵다.


저녁 7시 좀 안되어, 숙소로부터 걸어서 5~10분 거리의 Santiago Cafe & Resto 에 갔다.

손님 아무도 없고 어둑어둑 하다.

식당 바로 옆 가정집 문 앞에 앉아 있는 아저씨에게 영업 안하냐고 물어 봤다.

아저씨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영업한다고 대답하더니, 가정집 안에 대고 뭐라뭐라 부른다.

집 안에서 열린 문 사이로 아저씨의 부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다시 들어가고, 집 뒤편으로 이어진 식당 부엌의 불이 켜지며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난다.

비수기라 관광객이 통 없어서 거의 개점 휴업 상태인가 보다. ㅋㅋ


꺼놨던 테이블 전등을 켜고 메뉴판을 내민다.

가격대는 아주 저렴한 편이었다.

손님이 뜸했으니 식재료의 신선도가 걱정됐다.

현지인은 거의 잘 먹지 않는 쇠고기보다는 닭고기가 그나마 나을 거 같아, 치킨 스테이크와 사떼 아얌을 시켰다.

빈땅 맥주 큰 병을 시켰는데, 다 떨어졌고 빈땅 래들러 밖에 없댄다.

빈땅 래들러는 레몬향을 첨가한 맥주로 작은 사이즈 밖에 없는데, 내게는 너무 달고 가격도 비싸다.


기독교 지역이고 산간 지방이라 공권력이 약한 편일테니, 분명히 밀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뉴판에는 없지만, 혹시 아락 Arak (인니 전통 소주) 은 있는지 물었다.

"혹시 아락 있어요, 아저씨?"
"여긴 없지만, 저 아랫마을에서 팔아요."
어딘지도 모르는데 내가 사러 갈 수는 없는 일이다.
"혹시 사다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사다 주는 것이니 돈을 먼저 줘야 한다.
"얼마예요?"
"아꾸아 생수 물병 작은 걸로 3만5천 루피아예요."
아마 현지 주민들 가격은 2만 루피아 정도 할테지만, 3만5천 루피아라고 해도 엄청 싼 편이다.
바자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3분의 1잔 양의 아락이 3만 루피아였는데, 최소한 그 5배는 될 양이다.
아저씨에게 5만 루피아를 건냈다.
아저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가 5분쯤 후에 아쿠아 500ml 사이즈 플라스틱 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거스름돈을 내게 내밀었지만, 기분 좋게 팁으로 드렸다.


빈땅 래들러와 아쿠아 500ml 생수병에 꽉꽉 담긴 아락 밀주

밀주라 당연히 시야시가 안되어 미지근 하다.

얼음 주실 수 있는지 부탁했더니, 팁 받아서 기분 좋은 아저씨가 냉큼 수북히 갖다 준다.


아락 맛은 지금껏 마셔본 아락 중 최고였다.

양조 증류주 특유의 향이 약하고, 높은 도수에 비해 뒷맛이 깔끔했다.

시골 마을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맛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마 플로레스 지역의 물이 좋아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플로레스 지역 내에서도 물 좋기로 유명한 루뗑에서도 구해서 마셔볼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음식이 뚝딱 만들어져 나왔다.

손님이 뜸해서 약간 불안했는데, 음식맛도 좋았다.

약간 짠 편이라는 점만 제외하곤 소스 밸런스도 좋고, 고기도 적당히 잘 익혔다.

감자야 당연히 맛있고. (플로레스 여행 내내 감자 튀김은 늘 맛있었다.)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좋아서 식당을 차린 건가 싶다.


식당 바로 옆으로 개울이 지나는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간간이 지나는 차나 오토바이 말고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지라 제법 크다.

우려와 달리 맛있는 음식과 생각지도 못한 좋은 술에 기분이 좋다.


기분 좋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8시 반 쯤 되었다.

숙소 옆 모니스 플레이스 Moni's Place 레스토랑도 손님 하나 없이 조용하다.

이미 적당히 취했지만, 모처럼 업된 기분이 알콜을 당긴다.


원래는 라이브 공연을 했을 무대도 조용하고...


성수기엔 서양인 손님들 제법 있을 거 같은 실내도 텅 비었다.


직원에게 가볍게 먹을 안주로 추천 받아 시킨 음식

이름은 모르겠는데... 꽝이었다.

식빵 사이에 싱꽁 Singkong (카사바) 으꺠어 넣고 튀김옷 발라 튀긴 음식이었는데, 아까 점심 먹을 때 느꼈던 지나치게 진한 코코넛 오일 향이 났다.

음식 맛에 예민한 미식가는 아니지만, 재료가 변질되어 몸에 좋지 않을 거 같은 맛을 느낄 정도의 감각은 있다.

일부러 코코넛 오일 향을 많이 내는 전통 요리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역하게 느껴지는 걸로 보아, 이건 오래된 기름이라서 그렇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니에서는 저렴한 미냑 사윗 Minyak Sawit (팜유) 을 요리에 주로 쓰는데, 신선한 기름은 식용유나 별 다름 없이 향이 별로 없지만 오랫동안 재활용을 하면 코코넛 오일 탄 거 같은 진항 향이 요리 맛을 온통 뒤덮는다.)


음식은 한 개도 채 다 먹지 않고 맥주만 비우고 자리를 일어나니, 직원이 다가와 포장해 주냐고 묻는다.

괜찮다고 하고 식당을 나왔다.

시원한 맥주 뭐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ㅎㅎ


이번 여행 내내 따라 다니는 슈퍼문이 모니를 비춘다.

저 녀석이 하도 밝아서 별도 별로 안보일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