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직원이 깨워준다고 했는데 역시나 그런 일 없다.
혹시 몰라 5시로 맞춰둔 알람 소리를 듣고도 3분 정도 뒤척이다 겨우겨우 일어났다.
세상사 원래 100%란 건 없지만, 인니는 특히나 완전히 믿어서는 안된다.
약속 이행율이 한 70% 정도 할까? (근거는 없고, 그냥 경험상 느낌)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 좀 약한 편이다.
그래도 아침 식사로 팬케잌을 싸준 걸로 보아 깨워준다는 약속을 아예 잊은 건 아닌 거 같다.
팬케잌 다 준비되면 갖다 주면서 깨우려고 했나 보다.
새벽 6시 전에 숙소를 나서는데 아침 식사를 챙겨 받을 수 있는 건 숙소에서 투어를 예약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투어 예약했다면 국물도 없었을 거다.
5시 반에 출발한다더니, 45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5분, 10분 늦는 여행자들이 많아서 시간을 좀 일직 불렀나 보다.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상대방도 아마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하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스치듯 지나긴 했지만, 어쨌든 라부안 바조 언덕 풍경의 새벽, 낮, 저녁, 밤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덤으로 풀문이 아직 지지 않아, 새벽달이 항구를 밝게 비추는 진귀한 풍경을 보는 호사까지 누린다.
출발은 당연히 라부안 바조 항구에서 한다.
코모도의 자연 경관보다 저 풀문이 더 귀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모도는 언제든 와서 볼 수 있지만, 저 풍경은 운과 시간이 맞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 귀한 이유 역시 그렇다.
동쪽 하늘
동산에 가려진 라부안 바조 시내는 아직 짙은 새벽이라, 여기저기 아직 켜진 전등이 아직 있다.
비수기에는 이 많은 배들 중 하루에 뜨는 배가 극소수다.
출발을 기다리며 아침을 먹는 사람도 있다.
새벽에 억지로 일어난데다, 부두 특유의 기름 냄새가 강해서 식욕이 돋질 않는다.
6시 정각, 오늘 하루 종일 타고 다닐 배가 도착했다.
승객들이 모두 탑승하고 배가 출발하기 전, 투어 가이드(실제로는 선장 조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자만 편의상 붙임)가 오늘 투어 입장료를 걷겠다며 설명을 한다.
투어 코스 중 빠다르 Padar 섬과 코모도 Komodo 섬은 입장료가 있는데, 외국인은 30만 루피아, 내국인은 12만 루피아랜다.
승객들에게 일일이 돈을 걷던 투어 가이드는 승객 중 유일한 서양 사람에게는 30만 루피아를 걷었는데, 나한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심하는 내색도 없이 12만 루피아를 달라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아마도 내 현지인과 거의 비슷한 억양의 인니어와 탄 얼굴, 저렴해 보이는 행색 때문에 그랬지 않나 싶다.
나를 내국인으로, 정확히는 자카르타에 사는 중국계 인니인으로 착각하는 일은 그 이후로도 플로레스를 여행하는 내내 벌어졌다. ㅋㅋ
6시가 좀 넘어서 출발
왜 굳이 배를 출발시키기 전에 돈을 걷었는지 알았다.
딸딸이 엔진소리가 어어어어어엄청나게 커서, 귀 옆에 대고 말해야 들릴 정도였다... =_=
(딸딸이는 경운기의 충청도 사투리임)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코모도 1일 투어의 덤이다.
인니 동부 끝 띠모르 Timor 섬의 꾸빵 Kupang 에서 온 2명, 역시 꾸빵에서 온 1명, 서양인 1명, 자카르타에서 온 중국계 인니인 부부 2명, 나와 일행 2명 해서 총 8명이 오늘 하루종일 투어를 같이할 그룹이 됐다.
그 외 선장, 투어가이드, 투어 보조를 하는 학생 2명이 더 있다.
린짜 Rinca 섬 해변
사진으로는 식별이 안되는데, 사진 한 가운데 나무 그늘에 야생 코모도 도마뱀 한 마리가 보였다.
대략 100m 정도 더 지나서, 이번엔 야생 사슴 두 마리가 보였다.
역시 사진으로는 식별이 안된다.
스피드 보트가 우리가 탄 보트보다 한 3배 정도 빠른 속도로 앞질러 간다.
3배 빠르다는 건, 3시간 걸릴 곳을 1시간 만에 간다는 얘기다.
에어컨도 있고, 소음도 그리 크지 않다.
찬양하라, 돈의 힘이여~
코모도 일대 바다는 호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바다가 잔잔해서, 그림자가 비칠 정도였다.
하루종일 투어를 다니면서 파도를 본 적이 거의 없다.
특히 빠다르 섬 앞 바다는 너무 고요해서 섬뜩할 정도였지만... 배 엔진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덕분에 무서울 겨를이 없었다.
혼자 작은 배를 노 저어 지나간다면 무서울듯.
선착장 앞바다에 숙박을 포함한 장기 투어를 하는 배가 정박해 있다.
물 표면에 인 파문이 바닥에 비쳐 보일 정도로 맑다.
저런 광경을 보면 어렸을 적 봤던 여름 시즌 화장품 TV 광고가 떠오른다.
파마 머리에 파란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예쁜 누나가 야자수 보이는 하얀 해변에서 샤랄랄라 뛰거나 걷거나 수영하던... 뭐 그런 이미지였다.
투어 가이드가 10시까지 돌아오라고 한다.
빠다르 섬 관광 시간은 1시간이란 얘기다.
그리고, 혹시 드론을 띄우고 싶다면 1백만 루피아를 따로 내야 한댄다.
원래 무료였는데, 웨딩 사진 찍으러 온 중국인 커플이 불꽃 폭죽 터뜨리며 드론 촬영하고 지랄하다가 산에 불이 난 사건이 있는 이후로 그렇게 됐단다. ㅋㅋ
제법 깔끔해 보이는 화장실도 있으니, 짧은(?) 사람이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인니를 여행한다면 어지간하면 참는 훈련을 하길 바란다.
우리 투어 그룹의 경우도, 12시간 가까이 투어 중에 화장실을 간 사람이 두세 명 밖에 안된다.
저 깔끔해 보이는 화장실이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 따끈따끈 찜통이 됐다면 그 내부가 어떤 상황일지 생각해보자.
인니에서 여행지의 공중 화장실이란 원효대사 해골물 같은 개념이다.
너는 코모도 국립공원 지역에 있다.
산림법 1999년 발표 41조에 의거하여,
금지
- 허가 없이 입장
- 사냥
- 불을 피우는 행위
- 독이나 위험한 물질을 쓰는 행위
처벌
- 징역 1년
- 벌금 5백만 루피아
다음과 같은 방법들로 코모도 국립 공원에 대한 너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라.
1. 니 쓰레기는 니가 갖고 돌아와라.
2.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음식과 음료 용기를 써라.
3. 바다는 쓰레기통이 아니다, 이눔아.
4. 쓰레기를 분리해라. (분리수거해라)
5. 니 친구/형제/지인들이 언제나 환경에 사랑과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권해라.(응?)
입구에 공무원 복장을 한 사람들이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는데, 어느 배 몇 명인지 눈으로 파악만 할 뿐 입장하는 사람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에게 일일이 돈을 받지 않고, 투어 가이드가 걷어서 내는 방식으로 아예 시스템을 정한 모양이다.
드디어 지옥의 오르막 시작이다...
올라가야 할 꼭대기가 보이니, 나도 모르게 "아이, 시발 신난다~"라는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중간 쯤에 잠시 숨을 돌리는데, 돌무더기 그늘 속으로 쪼그리고 붙어 앉아 쉬고 싶을 정도다.
저 위에 보이는 나무 그늘까지 억지로 힘을 내본다.
빠다르 섬 절경이 보이는 뷰 포인트 직전에 있는 가장 난코스
계단이 많이 부서져 있고, 삐끗해서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꽤 빠른 속도로 꽤 한참 굴러 떨어지게 된다.
드디어 올라선 빠다르 섬 뷰 포인트
5만 루피아 지폐 뒷면에 나오는 그 풍경이다.
그 뒤로 다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이어지지만 별로 올라가고 싶진 않다.
힘들기도 했지만, 이미 9시 40분이라 내려가기에도 시간이 촉박하다.
크게 대단한 풍경은 없는지 다른 관광객들도 거의 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5만 루피아 화폐에 나오는 풍경의 정확한 스폿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청춘의 낭만 나부랭이가 충만해서 남 신경 따위는 1도 안쓰는 현지인 젊은 눔들 때문에 10분을 기다려야 했다.
각자 독사진에, 번갈아 단체사진에, 포즈 바꿔 또 찍고, 웃장 까도 또 찍고 아주 그냥 다채로운 지랄의 향연이다.
여기까지 올 정도면 교육의 혜택을 못받을 정도로 형편 어려운 집 자식 색히들은 아닐텐데, 인니인들 의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아직 좀 낮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게 기다려서 한 20초 만에 후딱 찍고 내려 간다.
와 시발 늦었다. 9시 50분이다.
사진 속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하늘색 체육복 상의의 여자애가 투어 보조로 따라온 여학생 두 명 중 하나다.
지역 기술고등학교 관광과에서 실습 나온 고등학생이다. (등판에 SMK라고 써있음)
인솔이나 설명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투어 그룹을 따라 다니면서 혹시 안전사고가 발생하는지 등을 살피는 일을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네 투어 그룹 관광객들이 시간 맞춰 내려오지 않는 걸 방지하기 위해, 같이 올라가서 제일 뒤에 남아 시간이 되면 내려가야 한다고 재촉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내려가는 나와 내 일행의 뒤를 알짱 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괜찮으니 먼저 내려가라고 했더니, 몇 발짝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만치 가고 있다.
역시 젊음이 좋긴 좋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이 정도 높이는 한 15분이면 가볍게 통통 튀어 올라갔을텐데, 이젠 그 세 배나 걸리면서도 몸이 무거워서 헐떡거린다.
* 인니엔 기술고등학교가 많다.
특히 시골은 인문계보다 기술계 고등학교가 더 흔하다. (한국도 옛날엔 그랬다.)
기술 고등학교는 졸업하기 위해 실습 시간을 충족해야 하는데, 부패가 만연한 인니답지 않게 매우 엄격한 편이라 반드시,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채워야 한다.(물론 편법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해서라도'가 중요하다.)
으헐... 아이를 안고 양산까지 씌워가며 올라가는 젊은 아줌마.
한쪽 어깨에는 아이에게 바람을 씌워주는 선풍기까지 달았다.
정말 대단하다며 엄지를 추켜 세워주고,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었다.
...근데 저 아기는 이 좋은 경치를 감상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게 함정
그러기는 커녕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변명부터 하자면, 물론 나도 흐뭇하고 대단한 광경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 그렇게까지 배배 꼬인 사람은 아니다. ㅋ)
다만, 어떤 좋아 보이는 일도 당사자 각자 입장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 역시 같이 들었다.
선행과 배려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자기 관점에서 비롯된 선행은 이기적 자기 만족을 위한 강요이기 쉽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겪어온 것들을 토대로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대입한 '자기 자신'을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희생했다 하더라도, 그게 선행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가 될 순 없다.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일이 반드시 훌륭한 일이란 법은 없다.
그저 남들이 하기 어려운 선택을 했다는 점만 대단할 뿐이다.
대상의 입장을 고려한 선행과 배려는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다시 저 멋진 젊은 아줌마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아기를 위해 일부러 힘듦을 무릅쓰고 자기 희생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엑스,
꼭 오고 싶었던 곳인데 아이를 따로 맡겨 놓을 수 없어서 같이 온 거라면 오케이!
... 나도 참 세상 더럽게 복잡하게 산다. ㅋㅋ
마지막 계단을 내려갈 즈음엔 다리가 풀려서 고생했다.
까딱 밑으로 내딛는 다리가 풀려 접히기라도 하면 앞떰부링으로 계단을 신속하게 내려가는 행운을 받게 된다.
배에 도착하니 10시 7분,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배에 탄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좀 미안했다.
딸딸이 엔진이 우렁찬 포효를 하며 다음 코스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