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I

책임 회피의 달인 - 어느 현지인 직원의 생존법

명랑쾌활 2024. 9. 1. 12:24

인니에 있는 한국 제조 업체 A사에는 얀띠라는 현지인 직원이 있었다. 영업부 고참 직원인 얀띠는 A사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직원이었고, 그런 그녀에 대한 사장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다. 회사의 모든 사정을 얀띠를 통해 들었고, 모든 영업 관련 업무들이 얀띠를 통해 진행되도록 했다.

하지만, 얀띠는 사실 사장의 신뢰를 이용해 자신이 잘못한 일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빠져나가는데 능했다. 어쩌다 한 번씩이라면 어느 회사에나 있는 흔한 케이스겠지만, 얀띠는 잘못을 매우 자주 저지른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A사의 업무 진행과 의사 소통이 대부분 구두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A사 사장은 기억에 의존하고 말로 지시하는 주먹구구식 스타일로 회사를 운영했다. 직원들 역시 당연히 그랬다. 그렇다 보니 사고가 터졌을 때 원인을 추적할 근거가 없다. 어떻게 된 거냐고 얀띠에게 물어 보면, 얀띠는 다른 직원에게 뒤집어 씌웠고, 그 직원은 고스란히 뒤집어 써야 했다. 말로 반박해 봐야 사장은 얀띠의 말을 신뢰할 뿐이다.

얀띠의 그런 만행은 A사 직원들 사이에 비밀도 아니었다. 관리 경력직으로 채용된 한국인 직원 이하청 차장도 입사한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런 정황을 알아 챌 정도였다. 비밀이기엔 그런 일이 너무 잦았으니까.

A사 내에 오직 한 사람, 사장만 그 사실을 몰랐다. 어쩌면 모르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A사는 고객사로부터 주문을 받아 납품하는데 다른 주문이 밀려 있지 않다면 통상 15일이 걸렸다. 주문을 받으면 그에 맞는 틀을 제작 업체에 의뢰하여 받기까지 7일, 틀을 사용해서 고객사 주문 제품을 생산하는데 다시 7일, 납품에 1일이 소요된다. 틀은 이미 제작에 들어갔다면 사용된 자재를 재사용할 수 없었기에 취소할 수 없고 새로 주문해야 했다.

어느 날, 고객사 현지인 직원이 A사 영업부에 메일을 보냈다. 3일 전 주문한 제품의 디자인이 변경될 예정인데, 변경이 가능하냐는 내용이었다.

얀띠는 제작 업체에 확인했다. 마침 다른 작업들이 밀려서 해당 틀은 다행히 제작 전이었다. 그녀는 즉시 틀 제작 업체 측에 홀딩해 줄 것을 요청했고, 고객사에 가능하다는 답신을 보냈다.

다음 날, 고객사 측은 변경된 디자인을 보내왔다. 

 

그로부터 1주일 후, 고객사 측에서 주문 했던 제품을 8일 후 납품해달라는 요청 메일이 도착했다. 얀띠는 그 납품 요청 메일을 보고서야 자신이 변경 디자인 메일을 확인만 하고, 틀 제작 업체에는 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늘상 그래왔듯 고객사 현지인 담당자에게 납기를 7일 미뤄도 되겠냐고 메일을 보냈다.

한국인 관리자까지 가지 않고 양쪽 회사 현지인 실무자들 끼리 사바사바 넘기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고객사도 보통은 일정에 여유를 두고 구매를 진행하기 때문에 보통은 그렇게 덮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번엔 문제가 달랐다. 수출 선적일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선적일은 죽어도 맞춰야 한다. 선적일을 못맞추면 최소 바이어 감점이고, 최악의 경우 클레임도 맞을 수 있다. 현지인 실무자 선에서 덮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고객사 현지인 직원이 안된다고 하자 얀띠는 틀 제작 업체 전화를 해서 최대한 빨리 제작해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틀 제작 업체는 다른 생산 일정들이 밀려 있어서 어렵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어떻게든 좀 생산일정을 좀 당겨서 제작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최대한 빨리 해도 최소 3일은 걸리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요, 아무리 빨라도 5일은 걸려요."

"최대한이면 3일이요? 그러면 그렇게라도 좀 부탁드려요. 어쨌든 최대한 빨리 해주세요."

그렇게 막무가내 사정을 한 후 전화를 끊고, 얀띠는 고객사에 납기를 3일만 늦춰주면 가능하다는 이메일을 상부 보고도 없이 '발송해버렸다'.

고객사 측도 3일 지연은 승인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여유가 있어서 납기 3일 지연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생산 일정을 변경하고 잔업을 해야 하는 피해를 감수한 거다. 오랜 거래처라는 점도 있지만, 이제와서 다른 방법은 없다는 점이 컸다.

문제는 생산 일정 변경과 잔업은 실무자 선에서 덮을 수 없다는 점이다.

사장이나 이하청 차장에게 보고만 했어도 그럭저럭 무마할 수 있었던 문제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큰 문제로 커졌다.

 

사장이 사실을 인지하게 된 건 이 시점이었다. 이미 몇 번 사고를 친 A사가 미덥지 못했던 고객사 측은 지연 납품 승인 메일을 보내면서 A사 사장 이메일 주소도 참조로 넣었다.

납품 지연 건이 있다는 보고를 직원으로부터 따로 받은 적이 없는 사장은 고객사의 메일을 보고 이상해서 직접 확인하여 사실을 알게 됐다.

얀띠는 사장에게 틀 제작 업체 직원이 3일이라고 해서 그대로 전달한 거라고 했다. 자신이 깜빡 해서 틀 주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잘못으로 묻어 버리고, 책임을 틀 제작 업체 쪽으로 떠넘긴 것이다.

사장은 얀띠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매우 화를 냈다. 이하청 차장에게 제작 업체에 컴플레인 할 것을 지시했다. 틀 제작 업체는 현지 업체였고, 사장은 현지어를 잘 못했기 때문이다.

묘한 일이었다. 틀 제작 공정 상, 3일 내 제작하려면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작업에만 매달려야 가능했다. 이쪽 업계 발 들인지 얼마 안되는 이하청 차장도 아는 사실이었으니, 사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얀띠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장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장에게 그런 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이하청 차장은 우선 틀 제작 업체에 전화해서 사실 확인부터 했다. 무턱대고 화낼 일이 아니었다.

"그 쪽에서 3일내로 가능하다고 했다면서요?"

"그럴리가요. 3일은 절대 불가능한 거 아시잖아요. 최대한 5일이라고 그 쪽 직원에게 분명히 말했어요."

"우리 솔직히 얘기합시다. 가능하지만 안될 수도 있는 일정은 얘기하지 말아요. 확실하게 되는 최대한 빠른 일정은 얼마나 걸려요?"

"솔직히 6일입니다. 하루 줄이는 게 최선이예요. 급행 비용도 추가됩니다."

"6일 내 완성하는 걸로 일단 진행해주세요. 우리가 차 보내서 실어갈테니 조금이라도 더 일찍 되면 연락 미리 주세요."

이하청 차장은 사장에게 통화 내용을 보고했다. 사장은 얀띠를 불러 추궁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하청 차장에게, 납기 6일 지연 사실을 고객사 측에 전달하는 걸 얀띠에게 시키라고 지시했다.

아무래도 사장이 직접 고객사 한국인 관리자와 통화를 해서 풀어야 할 사안 같았지만, 사장이 그러라는데 어쩌겠나. 이하청 차장은 지시대로 얀띠에게 내용을 전했다.

 

얀띠는 다시 사고를 쳤다. 사과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이 '납기는 3일에 3일을 더해 총 6일을 늦춰야 하며, 이는 당사 한국인 직원 컨펌한 사항이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고객사 측에 보내버린 것이다.

'3일에 3일을 더한다'는 표현도 부자연스럽지만, 얀띠는 평소 '자기 회사 한국인 직원이 컨펌한 사항'이라느니 하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원래 자기 말대로 3일 안에 가능한데 이하청 차장 때문에 3일이 더 미뤄진 것처럼 뒤집어 씌우고, 이제부터 벌어지는 일은 다 이하청 차장이 지시한 거라고 책임을 떠넘기려는 수작이었다.

겨우 늦춘 납기일도 번복할 뿐더러 이메일 내용도 '우리 한국인 담당자가 그렇게 시켰으니 너희는 따라라' 라는 식의 일방적인 통고 형식으로 싸가지 없게 보냈으니 고객사 측에서 노발대발하는 건 당연하다. 고객사 측은 '4일에서 단 하루도 더 늦출 수 없고, 이로 인한 잔업 비용 등 손실 비용을 청구할 것이며, 4일보다 늦어지게 된다면 항공 운송료도 청구하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A회사 사장까지 참조로 넣어 보내왔다.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졌지만, 얀띠는 이제 남의 일인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공급업체에 통보하지 않았던 사실도, 무리한 대응으로 고객사와의 협의가 깨진 사실도, 이제 다 묻혔다. 오로지, 이하청 차장의 지시대로 따른 잘못 밖에 없게 됐다. 이하청 차장이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냐'고 따져봐야, '난 그러라는 줄 알았다'라고 해버리면 끝이다. 문서 증거 없이 구두로 오간 지시 사항에 대한 시시비비는 얀띠의 전문분야다. 

사태는 결국, 틀 제작 업체에 통상 가격의 두 배를 지불하고 4일 내 납기로 앞당기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그렇게 제작한 틀은 내구성이 약하기 때문에 얼마 쓰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이번 사태 해결하는데만 쓰고 다시 주문해야 했다. 고객사 측에는 사장이 직접 전화해 감정을 풀었다.

얀띠는 끝내 처벌은 커녕 질책 조차 받지 않았다.

 

이하청 차장은 딱히 얀띠에게 따지지 않았다. 사장의 얀띠에 대한 신임이 그렇게 각별하다면, 아무리 자신이 직급이 더 높더라도 그녀와 대립하는 건 위험했다. 맹신하는 사람에게는 논리와 증거도 무용지물이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유대감은 더 쓸데 없다.

어떻게 그런 신뢰가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하긴 했다. 가장 먼저 의심해볼만 한 건 내연 관계겠지만, 얀띠는 농담으로라도 성적으로 끌릴 스타일은 아니었다. 용모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못생겼고, 몸매도 펑퍼짐했으며, 나이도 많아서 젊음에서 나오는 생기조차 없었다. 성격도 상냥함이나 애교는 아예 없었고, 말투마저도 종족 특유의 센 억양에 직설적이었다. 근거 없는 가쉽으로 소설 쓰기 좋아하는 회사 직원들마저도 사장의 얀띠에 대한 굳건한 신뢰의 이유를 남녀 관계로 연결시키지는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 관계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하청 차장이 보기에 둘 사이에 이성적 감정의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아는 바로도 회사 바깥에서 둘의 동선이 겹칠 가능성이 있는 날은 전혀 없었다.

인니에 온지 20년 가까이 되지만 A사 사장은 아직도 인니어가 서툴렀다. 회사 초기부터 얀띠가 단어나 띄엄띄엄 말하는 영어 실력과 눈치로 다른 현지인 직원들과의 의사소통 창구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맹목적 신뢰의 근거로 삼는 건 무리가 있다.

혹시 사람 정신을 홀려서 이성적 사고를 못하게 한다는 인니 주술인 펠렛 Pelet 에라도 걸린 걸까?

 

그 후 몇 년이 지나, 이하청 차장은 A사를 떠났다.

종종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얀띠는 아직도 A사 영업부 최고참 직원으로 건재하고, 사고 치는 것도 여전하다고 한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은 참 다양하고 정답은 없다.

 

쟤가 시켰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