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Ekas Lombok] 2. 석양은 예상한 정도, 공짜맥주는 의외여서 좋았다.

명랑쾌활 2016. 10. 10. 10:33


딱히 이름도 없는 해변을 다음 목적지로 잡은 이유는, 거기까지 길이 나 있어서다.


왼쪽은 그나마 아스팔트 포장 흔적이라도 남은 길, 오른쪽은 그 마저도 거의 남지 않은 길.

이러니 해 떨어지면 어디 나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


롬복의 성역 별 위의 천국 리조트... 라고 할 만큼은 아니다.

저 정도 간지러운 뻥을 칠 수 있다는 건 나름 대단한 일이다.


아스팔트가 벗겨진 비포장길이었다가, 아직 온전한 아스팔트 길이었다가...


다시 또 비포장길...

좌측에 보이는 건물은 스페인 사람이 짓고 있는 숙박업소라는데, 공사가 중단된듯 보였다.


저 곳은 현재 운영중인 숙박업소인 띠라 필라 에까스 베이 Tira Villa Ekas Bay

여기도 스페인 사람이 주인이랜다.


도로 상태가 가장 심각했던 비포장 급경사 내리막길을 지나...


이거 계속 가도 되는 건가 싶은 좁은 길 고개를 넘으니...


어거지로 길을 낸듯한 내리막길이 나온다.

오토바이 비숙련자들에게는 위험한 길이다.


그 길 끝에 해변이 펼쳐저 있다.


이게 그 뭐시냐 롬복의 성역이 어쩌고, 별 위의 천국이 저쩌고 하는 낯간지러운 이름을 가진 숙박업소다.


마치 개인 소유 해변인 것처럼 고적하고 깨끗하다.

그래서 별로다.

모름지기 해변이면 땡볕 피할 곳에 야자수나 맥주 정도는 팔아 줘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아니면 금발 비키니 미녀들이 떼지어 몰려 다니거나.


숙박업소 건물 자체가 천국이 아니라, 거기서 바라보는 경치가 천국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이런 깡촌 끝자락에 저런 건물을 지을 수 있다니, 서양눔덜 정말 대단하긴 하다.


아싸 좋다~

근데 외롭다... =_=


숙소로 돌아가려고 나서는데 마침 차를 타고 찾아온 서양인 커플과 마주쳤다.

사람 별로 없는 한적한 장소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의례 그렇듯, 미소를 띄고 눈인사를 하려는데 서양인 커플은 그냥 무표정하게 지나친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뭐 대접 받으려고 그랬던 거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긴 했지만, 찜찜하다.

아무리 동양인들이 다 똑같아 보인다지만, 설마 날 현지인 잡상인으로 볼 만큼 멍청하진 않을테고, 중국인으로 본건가?


길을 건너던 원숭이 가족을 만났다.

오토바이를 멈추고 사진기를 들이대니 후다닥 도망간다.

사람에 대한 경계가 극도로 심하다.


다시 길을 가다 마침 청년 하나와 마주치고서 그 이유를 알았다.

웃으며 서로 인사를 하는 와중에 청년은 원숭이 포획기로 보이는 기다란 기구를 자기 몸 뒤로 숨겼다.

나중에 숙소 매니저 헤루에게 여기 사람들이 원숭이 잡느냐고 물어봤더니, 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원숭이 포획은 법으로 금지됐다."

그래서 나도, "오, 법으로 금지됐구나!" 라고 대꾸하며 헤루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의 표정을 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 위의 천국 리조트 정문

돌에 원수라도 졌능가.


롬복의 풍경은 대체적으로 척박한 느낌인데, 남부는 특히 더 그렇다.

나중에 확인해봤는데 린자니 산 Gunung Rinjani 주변은 수량이 제법 풍부한 편이고, 멀리 떨어진 롬복 남부 지역은 강수량도 적은 편이라고 한다.


해가 질 무렵, 엄마와 딸로 보이는 두 명이 무거운 통을 머리에 이고 나란히 걷고 있다.

고단한 삶이라느니 하며 함부로 동정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여행자라는 존재가 오히려 저들의 행복을 깨는 해충일 수도 있다.

결핍에서 오는 불행하다는 감정은 불평등의 상실감 탓이며, 상대적 개념이다.

더 편한 삶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더 나은 삶은 아니다.

하지만 더 편해 보이고, 더 나아 보이는 비교 대상을 알게 되면, 그 전까지는 아무 느낌 없었던 일상이 참아내야 하는 고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선셋 이벤트를 가고 싶다면 5시 반까지 숙소에 돌아 오라고 해서, 꾸역꾸역 시간 맞춰 도착했다.

승합차 한 대에 매니저와 나 외에 서양인 두 커플이 같이 출발했다.

가는 길이 어째 별 위의 천국 해변 쪽이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기 맞았다. =_=


빛내림이 멋지다.

지평선에 떨어지는 석양은 못보겠지만, 이런 풍경도 나름 멋지다.


이건 나름 하이엔드 똑딱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


이건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
소프트웨어 설정이 너무 좋아서, 사진기 기능 활용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지간한 똑딱이 카메라 보다 아이폰이 더 낫겠지 싶다.


서양 남자 하나가 비싸 보이는 카메라로 석양을 찍고 있다.


아까 오후에는 저 계단 내려가는 게 귀찮아서 안내려왔었다. ㅋㅋ


좀 있자니 아까 여기 떠날 때 마주쳤던, 나를 무시했던 서양 커플이 반대편에서 걸어 왔다.

나와 같이 온 서양 커플 둘에게는 "하이~" 하며 방긋 미소를 짓고 지나간다.

딱히 마음이 상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기분 좀 상하긴 한다.

중국인으로 본 건가 싶다.

예전에는 어디 여행 가면 말레이시아나 싱가폴 사람이냐는 소리 가끔 듣긴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대만 사람이냐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일부' 중국인들이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어지간한 관광지에 중국인 없는 곳이 없다.

일부라고 해도 그 일부가 한국 인구 전체를 훌쩍 넘을 거 아닌가.


선셋 드링크 무료 제공이라길래 뭐 주스 나부랭이 하나 주나보다 했는데, 무려 차갑게 식힌 맥주!! +_+

저언혀 생각지도 못해서 감동 두 배다.

그래, 선셋엔 맥주지.


두 서양인 커플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노르웨이에서 온 남자, 호주에서 온 여자... 띄엄띄엄 이런 저런 얘기가 들린다.


혼자 떨어져 관찰하는 태도가 이제 많이 익숙해졌나 보다.

예전에는 나한테도 애써 말을 붙이려는 그닥 고맙지 않은 친절을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젠 너무 자연스럽게 내게 신경쓰지 않는다.

여행 왔는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럴 때 이야기 나누는 게 여행의 맛이 아닌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어색해 보이진 않을까 의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그래야 정상인 것처럼 남을 의식하던 시절이었다.

자신에게 너그러워도 된다는 걸 어느 정도 깨닫고 나서 편해졌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저런 사람이 있는 법이고, 혼자 조용히 있는 게 더 좋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래보여야 한다는 자신을 내려 놓으니 편해졌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왕 만(灣) Teluk Awang 을 사이에 두고 롬복 남부 지역인 건너편에 줄줄이 늘어선 불빛도 운치있다.

그 위로 빛나는 별도.

북반구 같으면야 냉큼 샛별 아니냐고 할 만도 한데, 남반구 하늘은 모르겠다.

별을 보면 별자리를 찾던 어린 시절은 이제 옛날이고, 지금은 그저 별이 많이 보이면 그 자체가 좋다.


선셋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찍은 사진

이정도로 깜깜한데다가 비포장인 길이니, 정말 밤에 나설 엄두가 안난다.


밤 7시경 숙소에 도착했다.

비싼 숙소답게 따듯한 물이 나와서 좋다.

서양인들은 한여름에도 어지간하면 찬물로 샤워 안한다고 어딘가에서 들었는데, 그래서 굳이 온수설비를 했는가 싶다.


잔디밭에 놓인 서핑의자에 앉았다.

바람 솔솔 부는데 워낙 건조한 지방이라 그런지 소금기도 없고 좋다.

별 잔뜩 떠있는 밤하늘을 기대했는데 구름이 가린 건 좀 아쉽다.

그래도 이 때가 여행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점심으로 먹었던 나시 고렝에 딸려 나온 닭튀김 아얌 딸리왕이 메뉴판에는 없다.

종업원에게 혹시 닭튀김만 따로 줄 수 없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그렇게 해주겠단다.

가격 물어보니 난감하다는듯 웃으며, 나중에 매니저에게 물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한다.

얼마일지 모르는 특별주문 메뉴라... 겁난다. ㅋㅋ

뭐 여기 올 정도 손님들이면 +-20만 루피아 정도는 별 부담 없이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맥주 홀짝이며, 닭튀김 먹으며(정말 맛있다! +_+), 책 읽고 있자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눈이 침침해져서 문득 밤하늘을 보니 별들이 와글와글 하다.

테이블 위의 촛불도 끄고 멍하니 하늘을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맛에 돈 열심히 버는 거지. ㅋㅋ'


* 후일담

닭튀김은 한조각 당 2만5천 루피아라는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더군다나 4조각이면 1마리 분량인데, 7만5천 루피아로 깎아줬다. :)

(인니에서는 보통 닭을 4등분하여, 다리 한 조각, 몸통 한 조각으로 셈한다.)

보통 메뉴가 8~10만 루피아 정도인 숙소 가격대에 비교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오너가 책정한 메뉴 가격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외 가능한 것은 매니저가 재량껏 처러해 준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