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싱가포르 당일치기를 할 일이 없겠구나 했는데, 다시 취업하는 바람에 찍고 오게 됐다.
인니에 취업해서 체류하는 한국인 대부분에게, 싱가포르는 관광지라기 보다는 취업 비자 때문에 당일치기로 찍고 오는 나라다.
취업허가 받으면 반드시 외국으로 출국했다가 재입국하면서 취업 비자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인니 법이 그렇다.
국내에서 비자 전환시켜 줘도 될 일이고, 코로나 국가 봉쇄 기간 동안엔 실제로 출국-재입국 없이 처리해줬었다.
다시 원상복구 된 거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경제적 이유가 있는 건지, 관료주의 때문인 건지.

니캅(눈만 내놓는 무슬림 여성 복장)을 쓴 중년/노년 여성 단체 관광객이 종종 눈에 띄는 게 인니 공항의 특이한 점 중 하나다.
하지 Haji (이슬람력 12월에 하는 메카 성지 순례) 나 움로 Umroh (그외 기간에 하는 메카 성지 순례) 를 가는 사람들이다.
무슬림 자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 중 하나가 부모님을 성지 순례 보내드리는 거다.
다른 이슬람 국가는 모르겠지만, 인니는 하지를 다녀온 무슬림의 이름 앞에 하지를 붙여서 호칭한다. (마치 닥터 OOO 하는 것처럼)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은 시골 사람이라면, 아마도 평생 처음이고 유일한 비행기 탑승 경험이 될 거다.
니캅 단체 관광객에는 반드시 그럴 것 같은 매우 어색하고 주눅 든 사람이 가끔 보인다.

당 충전도 할 겸 흡연실 이용도 할 겸, 스타벅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사먹었다. (아는 메뉴가 그것 밖에 없다)
평소 스타벅스 커피의 가격대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 아까워서 사지가 벌벌 떨린다.
내가 그렇다는 거지, 딱히 남들이 사치하네 뭐네 하는 건 아니다.
그 가격을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효용 가치가 있는 소비 행위다.
매일 스벅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본인이 버틸 수 있는 가장 최저 수준의 삶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행복감, 자존감 등등은 워낙 개인적인 심리라 충족 조건이나 비용은 사람마다 다르다.
다들 각자 삶의 방식이 있고, 그 반작용 역시 각자 알아서 치루는 거다.
자기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깔보거나 하지 않는다면야.

귀여운 체구의 비행기지만 중저가 비행사인 (저가보다 살짝 급이 높은) 바띡 에어 Batik Air 다.
라이온 에어 Lion Air 는 사고가 너무 잦아서 타기 꺼려진다.
뉴스에 나올만큼 큰 사고도 몇 번 이지만, 자잘한 사고는 수시로 터진다.
서울에서 대전 간 비행기가 다시 부산으로 대구로... 항송 스케줄을 워낙 촘촘하게 짜서 연착이 당연한 항공사인데 정비라도 제대로 할 짬이 있을지 의문이다.

컨테이너선이 줄 서 있는 바다와 바글바글한 고층 아파트
싱가포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내리자마자 담배 한 대 때리러 흡연 구역에 갔다.
관상식물로 꾸밀 정도면 차양도 설치해줄만 한데...

이제 싱가포르도 입국심사 공무원을 대면하지 않는다.
앱을 통해 사전 입국 신고를 하고, 안면인식 카메라와 여권 스캐너가 설치된 무인 창구를 통과하면 끝이다.
스마트폰 없는 사람, 조작이 어려운 사람은 살기 힘든 세상이다.
효율에는 항상 소외되고 불이익 받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곧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비효율이다.
흔히 사람들은 합리와 효율을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만 인식하지만, 그것들은 선악의 개념이 아니다.

워낙에 녹지가 적다 보니 이런 인테리어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동안 싱가포르 당일치기를 할 적엔 비자 업무 대행 업체에 예약을 하고 왔었다.
취업 비자 관련 서류를 인니대사관에 접수해서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당일 접수 당일 처리를 하려면 업체(브로커라고 볼 수 있다)를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하면 3일 걸렸음. 원래 규정이 3일인 걸 업체 통하면 급행으로 처리해주는 거라 개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딴지 걸기도 애매했음)
그러나 이제 모든 비자의 발급과 등록이 전산으로 처리돼서 인니대사관에 접수를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말 그대로 외국 땅 찍고, 다시 인니로 입국하면 끝이다.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인니 국내에서 처리해도 돼잖아... 여전히 등신 같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덜 등신 같다고나 할까.
그 때문에 비자 업무 대행 업체들은 모조리 망했을 거다.
비자 업무 대행 업체는 결코 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대행수수료 인당 50달러 잡고, 월 평균 200명이라면 1만 달러다.
늘 가던 업체 사장님이 "이 사업으로 그럭저럭 자식들 대학교까지 건사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한국 정치 얘기를 자꾸 걸길레 대충 대답해줬더니 나더러 대뜸 '문빠'냐고 묻던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ㅎ;;
코로나 봉쇄 때 버티느라 벌어둔 돈 까먹었다면 타격이 더 컸을 거다.
사업 망하면 능력이 모자라거나 멍청하거나 게을러서 그렇다는 인식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런 경우는 대부분 사업 초창기에 망한다.
3년 이상 잘 유지해서 본 궤도에 오른 사업이 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운이 없어서다.
국가나 사회공동체는 구성원에게 윤리의식을 교육(=세뇌)할 때 노력을 강조하고 운의 작용을 최소화 한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되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만사 성사는 운이 9고 노력이나 능력은 1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노력이라도 해야 그나마 행운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맞다. 그래서 노력을 0이 아니라 1이라고 했다.
로또에 비유하면 딱 맞겠다.
로또 맞기 위해서 매주 시간 내서 로또를 열심히 사는 노력을 한다.
로또를 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로또 맞을 일도 없다.
그래서, 로또 열심히 사는 사람이 로또 사는 노력조차도 안하는 사람에 비해 뭐 그리 낫던가?
심지어 운이 극단적으로 좋으면, 로또 안샀는데도 그보다 더한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
애초에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 자체가 극단적인 운의 영역이고 부모나 출신 배경 역시 극단적인 랜덤이다.
태어나자마자 각자 다른 인생 출발선에서 나아가야 한다.

당일치기 여행하기 딱 좋은 상황이지만, 내일 출근해야 하는 처지라 그럴 심적 여유가 없다.
하루에 비행기 두 번 타는 일은 상당히 피곤하다. 일찍 집에 가서 푹 쉬는 편이 낫다.
싱가포르 입국 3시간 후 출발하는 자카르타 항공편을 예매해뒀다.
탑승 대기 시간까지, 이제 공항에서 대략 두 시간을 때워야 한다.



일단 천정 폭포를 보러 간다.
유우명하다니까 보러 가긴 하지만 딱히...


와아... 별 거 없다.

진짜 주방...
외국 어디에 일식집 생겼다고 해서 '일류'라고 하지 않듯, 이제 어디에 한식당 생겼다고 해서 딱히 한류라고 호들갑 떨 수준은 넘은 거 같다.
...근데 알파벳을 모국어 문자로 쓰는 사람들 눈에는 JJ라는 표기가 어떻게 인식될지 궁금하네. 완전 근본 없는 용법 아닌가.

싱가포르 GDP가 한국 두 배 넘는데 메뉴 가격대가 한국 물가랑 비슷하다. 그것도 공항 식당인데.
싱가포르가 비정상인가, 한국이 비정상인가.

공항 내 무료 운영하는 열차도 타본다.
인천공항에도 있는 거 아니냐 싶겠지만, 거긴 탑승 수속 마치고 들어간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고, 여기는 외부 무료 개방이다.

천정에서 물이 새서 새워둔 주의 표지판.
싱가포르하면 치안과 관리 빡빡하게 돌아가는 나라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담배 한 대 피우러 청사 밖으로 나왔다.
흡연구역은 건물 바깥 양쪽 끝이다.
중간 중간에 유리벽 건물로 흡연구역을 만든 인천공항이 더 훌륭하다.
물론 건물 바깥이기만 하면 대애충 어디든 흡연할 수 있는 인니에는 못당하겠지만.
아, 혐연자들에게는 선호 순위가 정반대겠지.


공항 대기 시간이 점심 때에 딱 걸트려 있다보니 끼니를 때워야 했다.
팔팔하던 시절엔 점심 한 끼 정도 건너 뛰어도 그냥 허기만 견디면 됐는데, 이젠 기력이나 주의력 등 신체 기능이 저하되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어르신이 끼니 때 놓치는 거 예민한 게 다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성질이 더러워져서 그런게 아니라, 실제로 몸 상태가 안좋아지니까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짜증이 나는 거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 그냥 라멘을 먹었다.
싱가포르에서 일본 라멘을. ㅎ

탑승 대기하러 가는 길에 입국할 때 들렀던 흡연구역에 다시 들렀다.
여정의 수미쌍관이다.


인니살이 십몇년.
착륙할 즈음 보이는 별별 공장들 다닥다닥한 풍경이 정겹다.
저 다 낡아 빠진 공장 한 채 소유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 공장을 유지해나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제는 깊이 체감한다.
앞으로의 시간이 더 많았던 시절엔 막연한 가능성 따위만 믿고 하찮게 여겼던 것들이다.
참으로 아둔하고 어리석다.

인니 공항 역시 입국 및 세관 신고를 미리 스마트폰 앱으로 등록하고 QR코드를 받아 입국한다.
확실히 입국 수속 시간도 확 줄고 편리하긴 한데... 스마트폰 없는 사람은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늘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