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II

일머리가 부족한 거 같아

명랑쾌활 2025. 2. 16. 08:14

20여 년 경력자가 있다.

자기 분야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고, 여러 상황에 대해 유연하게 답을 척척 내는 유능한 현지인이다.

 

건조장에 제품을 적치하는 기준선을 긋자고 한다.

열풍이 나오는 벽면으로부터 1m와 50cm 간격으로 번갈아 가면서 평행하게 줄을 치면 됐다.

 

<사진 출처 : 09star.kr>

 

마침 레이저 레벨기가 있길레 써봤더니, 열풍이 나오는 벽과 옆벽이 직각에서 약간 틀어져 있었다.

그랬더니 옆벽과 직각을 맞춰서 기준선을 칠해야 한댄다.

 

도대체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애초에 기준선은 열풍 나오는 벽면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제품을 적재하자고 긋는 거다.

열과 아무 상관 없는 옆벽과 굳이 직각을 맞출 이유가 없다.

건물이 직각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열풍 나오는 벽면과 수평으로 간격을 유지하면 된다.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아니, 듣는 척만 하고 이해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자기는 이 분야 전문가라는 고집 같은 걸까

꾸역꾸역 직각을 맞추겠다고 써본 적도 없는 레벨기와 씨름을 한다.

양쪽 옆벽이 평행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틀어졌을 확률이 높다) 옆벽을 기준으로 잡으려고 하니 측정값이 계속 틀리기만 한다.

아무 말 않고 그 병신짓을 보조해줬다.

20년 경력자는 한참을 씨름하다 줄 두어 개를 긋고는 건조장 담당자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건조장 담당자는...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촌사람이고, 물론 이런 종류의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건조장 담당자에게 조언했다.

레이저 레벨기고 나발이고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노끈 가지고 양쪽 끝에서 간격 맞춘 후 팽팽하게 당기고 분필로 노끈에 맞춰 바닥에 표시하면 된다고. (노끈은 현장에 널려 있다)

그랬더니 건조장 담당자가 대뜸, 그럼 '집 지을 때 쓰는 실'이 있어야 한댄다. 

 

수평규준실 <사진 출처 : gmarket.co.kr>

 

아... 이 등신들 뭐지?

우리가 지금 1~2mm 오차 따지는 타일 붙이기 하는 줄 아나?

그럼 지금까지 기준선 따위도 없이 눈대중으로 제품 때려 넣고 간격 맞춰서 대충 일해왔던 건 무슨 깡으로 그랬는데?

끝단 오차 10cm 정도는 별 문제는 없을텐데?

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처다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파는데 얼마 하지도 않는댄다.

아니, 이 사람아. 얼마가 문제가 아니라, 거저 준다고 해도 뭐하러 그걸 사러 밖에 나갔다 와. 그거 사러 간다고 또 반나절 날려 먹고 내일부터 하게?

인니인들은 원래 '회사일에 한해서' 뭘 좀 하자고 하면 거창한 핑계를 대며 거창한 도구를 요구하는 습성이 있다.

평소에는 맨발로도 잘만 왔다갔다 하던 풀밭 위에 자재를 옮겨 놓자고 하면 안전화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를 하는 인간이 셋에 하나는 꼭 튀어나온다.

지가 아쉬워서 해야 하는 일에는 '와, 그걸 그렇게 써?'라고 감탄할 정도로 창의적일 수가 없으면서.

결국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지금 할 일을 내일로 미루려는 현지인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마법의 언어,

'내가 책임질테니까 닥치고 지시대로 하세요'를 시전해야했다.

가뜩이나 기질 센 한국인이 이곳에 오면 더 성질 더러워지는 이유 중 하나다.

 

건조장 담당자는 입이 튀어나와서 내 지시대로 노끈을 사용해 선을 그었다.

현지인들은 대체적으로 느리지만 꼼꼼한 편이라 선은 깔끔하게 잘 그어졌다.

그리고 결과물은 저언혀 문제 없었다.

 

 

인니인들과 일하다 보면 자기가 해왔던 일에 대해서는 경험이 풍부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나 일머리 수준이 상당히 낮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물론 한국인 중에도 일머리 없는 사람, 요령이 부족한 사람은 그리 드물지 않지만, 비율적으로 봤을 때 인니인 쪽이 확실히 더 높은 거 같다.

교육 수준 차이도 있지만, 익히도록 요구되는 지식의 폭이 넓고 좁은 차이도 원인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대졸에 자기 분야에 척척인 사람이라고 해서, 한국의 대졸처럼 생각하면 괴리감을 느낄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