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업으로 했어도 평균 월 6백만원은 벌었어요. 안디가 3백, 제가 3백 나눠 가졌죠. 설비가 있다면 더 벌 수 있습니다."
아르디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가 내민 제안서에는 원료 단가나 생산 코스트, 매출 같은 구체적 수치가 없었다. 하지만, 미스터 킴은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미스터 킴의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암 판정을 받고 화학 치료를 거쳐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아직도 한 달에 한 번 투약을 받아야 했다. 완치는 불가능했고, 회사는 그만 뒀다.
그는 책임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주어진 책임은 끝까지 다 지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남겨질 가족에게 지속적인 수입원이 되어줄 사업 아이템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어두고 싶었을 게다.
난 미스터 킴과 다른 사업을 진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르디 사업은 후면에서 보고 자료 취합하고 자금 관리만 해달라는 미스터 킴의 부탁을 받고 합류한 참이었기 때문에, 미스터 킴의 결정에 전면에 나서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아르디가 예전에 미스터 킴 부하직원으로 일했고, 퇴사 후에도 몇몇 비즈니스를 같이 진행했던 사이라, 미스터 킴이 어련히 알아서 판단했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월 수익 6백만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2개월이 지나 어느 정도 자료가 쌓인 후 손익 구조를 따져 보니 만들어 팔면 팔수록 적자가 발생하는 구조였다.
계산값을 미스터 킴에게 전달했고, 미스터 킴은 아르디를 불러 추궁했다.
"재활용 제품 생산만 갖고는 당연히 이익이 얼마 되지 않아요. 재활용 자재를 받아서 상태가 괜찮은 건 이문을 붙여 다른 업체에 되파는 것까지 감안해야 월 6백만원 정도 나와요."
아르디는 마치 애초에 얘기하지 않았냐는 투로 천역덕스럽게 말했다.
미스터 킴은 상태가 괜찮다는 재활용 자재는 그럼 왜 못받고 있냐고 물었다.
아르디는 상태 좋은 자재는 안디라는 에이전트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데, 미스터 킴이 안디를 배제하고 직접 자재를 사입하고 있기 때문에 못받는다고 했다.
나는 자재 공급처를 방문했다.
자재 공급처 총책임자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안디라는 사람이 자기 회사 영업 사원인데 3개월 전 결제 금액 떼먹고 잠적한 상태고, 아르디는 안디와 동서지간이라고 알려줬다.
3개월 전이면 아르디가 미스터 킴에게 사업을 제안했을 때 즈음이었다.
그 사실을 미스터 킴에게 전달했지만, 미스터 킴은 아르디를 다시 추궁하지 않고 덮었다. 대신 처음 제안했던 재활용 사업 A를 중단하고 다른 아이템인 B 사업은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이때까지는 한 발 물러선 입장이었는데, 미스터 킴이 나더러 전면에 나서서 관리하기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빠지는 게 맞는 타이밍이었지만 이제와서 손 털기엔 애매했다. B 사업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이익이 나오는 구조였고, 만약 내가 손 털고 빠지면 그동안 들어갔던 미스터 킴의 자금은 공중분해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미스터 킴이 전면에 나서기에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 나와 진행하기로 했던 다른 사업은 답보 상태였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가 손 털고 빠지면 같이 하기로 했던 사업도 없었던 일이 될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섰다.
그동안 아르디가 관리하던 거래처들을 일일이 방문해서 정리했다. 아르디가 미팅 약속을 잡지 않고 어영부영 미루는 업체들도 정리해버렸다. 그러고 나니 남은 거래처는 단 두 곳이었다.
한 곳은 직접 면담해보니 괜찮은 거래처였고, 나머지 한 곳은 미팅은 하지 못했지만 거래 규모가 크고 결제가 깔끔한 업체였다.
매출 규모는 확 줄었지만 앞으로 몇 달만 고생하면 조금이나마 이익금도 회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스터 킴과 따로 하기로 했던 사업도 드디어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 첫 발을 떼기 직전, 미스터 킴은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급히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사실을 나는 문자로 전달 받았다.
귀국 3일 후 미스터 킴은 내게 전화해서 모든 사업을 전면 중단해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B 사업은 내게 넘길테니 정리를 하든 끌고 나가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통화 오래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5분 정도 통화하다 끊었다.
미스터 킴과의 통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일주일 후 아르디와 미팅했다.
미스터 킴이 덮어놨던 사실을 모두 오픈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려는 아르디의 말을 막았다.
"추궁하려는 게 아니예요. 진짜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고, A 사업을 접은 이유가 뭔지 알려 주려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B 사업에만 매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요."
미스터 킴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도 전했다.
"상황이 많이 안좋아요. 남겨질 가족을 위해서 사업을 그렇게 급히 진행했던 겁니다. 미스터 킴은 B 사업의 전권을 내게 맡겼지만, 사실 전 그리 비중을 두지 않았어요. 따로 진행하기로 한 다른 사업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이왕 이렇게 됐으니 사업 최대한 정상화 시켜서 최소한 미스터 킴의 투자금이라도 가족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뭐 정 안되면 정리하고 털어야겠지만요."
아르디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자기도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 미스터 킴의 부고 소식이 전해져왔다.
아르디에게는 일단 알리지 않았다. 충분히 가까웠다면 따로 전달 받았을테고, 아니라면 굳이 내가 나서서 급히 알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미스터 킴은 전 직장에 자신의 소식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고, 아르디는 미스터 킴과 전 직장에서 만난 사이다. 아르디에게 알리면 전 직장에도 소식이 전해질 게 뻔했다.
그즈음부터 아르디는 사업장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생산 보고는 때마다 들어왔지만, 통화가 잘 되지 않았고 문자 메시지 역시 한참만에 확인하거나 확인하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정리하고 남은 두 거래처 중 미팅을 하지 못한 거래처의 결제도 기한을 넘겨 늘어지기 시작했다.
느낌이 쌔했다. 미팅을 소집했다.
아르디는 일 때문에 지금 다른 지방에 있어서 주말이 되어야 일정을 알 수 있겠다고 답장이 왔다.
그리고 거래처 결제 밀리는 문제는 자신이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토요일 밤 12시가 다되어 아르디에게서 문자가 왔다.
거래처가 결제 금액 일부를 자신의 계좌로 보내왔다며, 밤 9시에 거래처에서 자신의 계좌로 송금한 내역 캡처한 사진과 방금 자신의 계좌에서 회사 계좌로 그 금액을 송금한 내역 캡처 사진을 보내왔다.
미팅은 어떻게 할거냐고 문자를 보냈지만, 확인만 하고 그 이후로 답장이 없었다.
일요일까지 회신을 기다렸지만 아르디에게서는 끝내 연락이 없었다.
화요일, 총무와 생산 팀장을 소집해서 미팅했다.
아르디는 생산 쪽에 완전히 신경을 끊었는지, 자재가 거의 떨어져 가는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아르디는 일단 없는 셈치고 생산 팀장이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총무에게는 결제가 늦어지는 거래처와 통화하도록 지시했다.
그날 밤 총무는 거래처 사장으로부터 받았다며, 아르디 계좌로 결제 금액을 송금한 내역들을 보내왔다.
모든 결제는 결제일 이전에 정상적으로 송금되었다.
장부와 대조해보니, 거래처가 송금했다는 총 5건의 결제 중 2건만 회사에 입금되었다.
내역들 중 마지막 것이 눈길을 끌었다.
아르디가 토요일 밤 12시에 내게 보냈던 거래처 송금 내역이었는데, 송금일시가 초단위까지 똑같았지만 송금액만 달랐다.
다른 내역들과 비교해보니, 아르디가 내게 보낸 송금 내역은 거래처로부터 받은 캡처 파일의 금액 부분을 에디터로 변조한 흔적이 보였다.
거래처로부터 토요일 9시에 받은 5번째 송금 내역을, 금액의 숫자만 2번째 결제 액수로 맞춰 위조한 거였다.
아르디는 거래처로부터 5건의 결제를 이미 받았지만, 그중 2건만 회사에 입금한 것이다.
자기는 거래처로부터 입금 받자마자 바로 회사로 넘겼다는 걸 입증하려고, 위조까지하는 꼼꼼함으로.
차라리 자기가 회사에 입금한 내역만 보냈으면 될 걸 괜히 머리 쓰다가 오히려 범행의 증거를 남겨 버렸다.
거래처 사장은 아르디와 10여 년 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했다.
결제 계좌가 바뀌었는데 문제가 있다며, 일단 임시로 자기 계좌로 송금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얄궂게도 아르디가 회사에 송금하지 않기 시작한 건 미스터 킴이 세상을 떠난 2일 후 입금된 결제건부터였다.
아르디는 미스터 킴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딴주머니 생각부터 한 모양이다.
애초부터 신뢰를 저버리는 행각을 보였던 인간이다.
미스터 킴이 덮어두었던 것들 공개한 것도 '네가 머리 굴려봐야 다 드러난다'는 경고의 의미였지, 개과천선을 바란 게 아니었다.
딱히 실망감은 들지 않았다.
횡령한 돈은 회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나마 비교적 초기에 발견하는 바람에 액수가 그리 크지도 않다.
그 액수만큼을 퇴직금으로 주며 빠지라고 했으면, 두고두고 지분거렸을 거다.
스스로 사고를 치고 잠적했으니, 허튼 수작 부리기 어려울 터다.
내내 골치 썩이던 인간이 알아서 빠져줬으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다만...
나와 미팅하던 날, 미스터 킴이 어떤 마음으로 사업을 투자했는지 얘기했을 때 보였던 그의 글썽거리던 표정은 뭐였을까.
인간이 어디까지 염치가 없어질 수 있는지, 악인과 평범한 사람의 경계는 어디쯤일지는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