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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심장을 가진 허깨비] 11. 각서로 돌려막기의 장인

명랑쾌활 2024. 12. 15. 10:03

케빈이 퇴사할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장은 즉시 케빈과 관련된 대금 미수금 건들을 조사했다.

케빈 입사 후 1년 간 발생한 미수금 건들을 연말 회계 마감 때문에 완결 지으라 지시한지 2년이 다 되도록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어져 왔고, 오히려 그 후 몇 건이 더 추가된 상황이었다.

사장은 그 동안 케빈의 보고만 믿고 기다렸던 건들을 직접 거래처에 확인했다.

사장은 참담한 얼굴로 그 결과물을 내게 보여줬다.

 

가장 눈에 띈 건, 케빈의 자필 변제 각서 복사본이었다.

글로벌 업체 납품 위탁 생산을 했던 업체의 회사 공식 용지(레터지)에는 만난 장소, 시간, 참석자가 명시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항목별로 변제 이유와 금액, 변제 약속 기한이 케빈의 자필로 적혀 있었다.

항목 중에는 '케빈의 잘못'이라고 분명히 명시된 것도 있었고, '개인적인 빚'이라는 300만원 가량의 채무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명시된 모든 변제 건은 케빈 개인이 책임진다고 쓰여 있었다.

변제해야 할 총액은 약 7천만원이었고, 각서 수신자는 위탁 생산 업체의 상무였다.

 

예전 케빈이 전 직장에서 자기 사비 써가면서 일했는데 쫓겨났다고 했는데, 그 게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벌 업체에 기준 이하 품질의 제품을 밀어 넣어서 납품이 무산된 이후, 우리 회사와 위탁 생산 업체는 분쟁 중이었다. 우리 회사는 청구 금액을 모두 지불했고, 납품이 무산된 반품 제품을 돌려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위탁 생산 업체는 추가 생산으로 발생한 비용을 결제해달라 요청하고 있었다. 케빈이 업무상 의사 소통에 오해가 있었다며, 자신이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8개월 넘도록 늘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장은 위탁 생산 업체 상무를 직접 만나서 일단 서로 양해가 되는 부분은 합의했고, 나머지는 추후 각자의 자료를 대조해서 다시 협상하기로 했다.

협상 분위기는 험악한 분위기나 고성 없이 신사적으로 마무리됐다고 한다.

협상이 끝나자 위탁 업체 상무는 미리 준비해뒀던 각서의 복사본을 아무 말 없이 내밀었다고 한다.

 

그 외에 다른 미수금 건들은 대부분 케빈 전 직장 출신 외부 에이전트 라이언과 관련되어 있었다.

주로 우리 회사가 라이언이 세운 업체에 위탁 생산을 의뢰하면서 선금 50%를 지급했지만 제품도 오지 않고 선금도 되돌려 받지 못했다는 건들이었고, 회사 불용 자재(생산에 쓰이지 않는 자재)를 매각했지만 대금을 받지 못한 건도 있었다. 이런 회사와 거래가 지속 됐던 건 케빈이 미수금 문제는 다 해결될 거라면서 사장 보고 없이 직권으로 진행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에게 연락해서 회사로 오라 했으나 사업 때문에 출장 중이라 올 수 없다며, 문제의 선금들은 모두 케빈의 개인 계좌로 송금했었다고 했다. 송금 내역을 요구했고, 라이언은 찾아보겠다고 답했다.

그 외 이미 케빈에게 결제했다며 케빈의 서명이 있는 수기로 작성한 영수증 복사본을 보내온 업체와 제품을 회수해갔다며 반출 송장 복사본을 보내온 업체가 있었다.

 

 

사장은 케빈을 본사 사무실로 호출했다. 사장과 독대 후, 케빈은 굳은 표정으로 본사를 떠났다.

나를 부른 사장은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

사장은 케빈에게 증거 자료들을 내밀며 해명을 요구했다.  케빈은 각서가 '회사와 관련이 없는 개인 채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작성한 확인서'라고 해명했고, 라이언의 말은 자기를 모함하려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사장은 케빈에게 본인의 해명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증빙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사장과 얘기를 나누는 중 경리 직원이 방금 라이언으로부터 왔다며 프린트물을 제출했다. 사장은 프린트물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내게 건냈다. 라이언의 통장 내역이었다. 지난 2년 간의 통장 내역을 통째로 보내왔는데, 케빈의 개인 계좌로 송금한 내역이 줄줄이 나와 있었다.

한참 숨을 고르던 사장은 도저히 안되겠다며 내게 담배를 달라고 했다. 사장은 근 1년 가까이 금연하고 있었다.

말없이 담배를 몇 모금 피우던 사장은 내게 말했다.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상황을 먼저 묻지 않고 증거 자료부터 주면서 기회를 줬다. 만약 이 통장 내역도 케빈과 면담 전에 받았다면, 다른 증거 자료들과 같이 줬을 거였다. 해명 들은지 30분도 안돼서 이렇게 밑바닥을 보게 되어서 마음이 찢어질 거 같다고.

정말 공교로웠다. 케빈과의 면담 중에 통장 내역도 내밀었다면 케빈은 그에 맞춰 둘러댔을 것이다. 타이밍이 어긋나는 바람에 케빈의 거짓 해명은 고작 한두 시간 만에 들통나 버렸고, 맨얼굴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었다.

 

배신감에 치를 떤 사장은 집요했다. 케빈의 미수금 리스트를 처음부터 전부 재검토하는 중, 재활용 원료 건이 아예 리스트에서 누락됐다는 걸 발견했다. 70만 개 오더 미수금 사건이 터지기 전, 후속 예정 오더 30만 개를 생산할 원료를 구매하고자 선금을 이미 지불했던 건이었다.

미수금 사건 대책 회의 때 케빈이 회사에 공간이 없어서 공급처에 원료를 홀딩해뒀다고 했었다.

사장은 내게 어째서 리스트에서 빠졌는지 물었다.

당시 케빈이 내게 재활용 원료 대금 지불 증빙을 잃어버렸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고, 내가 경위서를 제출하라고 했던 일이 기었났다. 회사에서 관대하게 넘어간다면 손실로 상각처리 될 수도 있다고 한 것도.

경리를 시켜 회계 자료를 찾아보니 이미 상각 처리가 되어 있었다. 상각으로 털어 버렸기 때문에 미수금 리스트에서도 빠진 것이다.

첨부된 상각 승인서에는 사장의 결제란이 비어 있었고, 고문의 서명만 있었다. (고문은 회사 소유주다) 서명일과 상각 처리일은 동일했는데, 하필 월요일이었다. 사장은 주간회의가 있는 월요일엔 반드시 회사에 있었다.

케빈은 간혹 고문의 전결로 자금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틈새를 이용해서, 사장이 뻔히 회사에 있는데도 고문의 서명만 받아 그날 바로 사장 몰래 상각 처리를 해버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고문을 그럴듯한 말로 현혹시켜서. 

 

현금 거래를 하는 재활용 원료 공급처에 자료가 있을지 확신은 없지만, 일단 연락해서 대금 지불했는데 왜 아직까지 원료를 보내지 않냐고 따졌다. 공급처에서 자료를 보내왔다.

또 케빈이 작성한 각서였다. 대금 영수증 용지에 케빈이 자필로 쓴 내용이 있었다.

원료 공급처에 케빈이 개인적으로 진 빚을 본 자재 대금으로 상쇄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케빈이 책임을 진다고 적혀 있었다.

 

며칠 후, 사장은 수요일에 다시 케빈을 본사로 호출했다. 해명 자료 준비는 제대로 진행 됐냐고 물었다.

케빈은, "오래된 자료도 있고 해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계속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사장은 라이언이 제출한 송금 내역 리스트를 케빈에게 내밀며 해명해 보라고 했다.

"두 번 정도 개인적으로 돈이 급히 필요해서 따로 송금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내역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유용한 적 없습니다."

사장은,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면 회사를 위해 썼다는 건데, 그럼 하다못해 접대했다는 영수증이라도 제시를 해보라고 했다.

케빈은 증빙을 미처 챙기지 못했지만, 어쨌든 개인적으로 쓰진 않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장은 다시 재활용 자재 구매 관련 자료를 내밀었다.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회사 입사 전에 사정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돈을 빌린 곳이 많았는데, 이 업체도 그 중 한 곳이었습니다. 거친 곳이라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독촉을 해왔는데, 이 때 원료 대금으로 지불한 걸 돌려달라고 했더니 저한테 받아야 할 빚으로 받겠다면서, 싫으면 여기 못나갈 거라고 위협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어서 각서를 작성했는데요, 이 각서 안썼으면 저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사장은 다음 주 월요일에 고문까지 함께 면담할테니, 해명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그때까지 전부 가져 오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유용한 돈은 없다라... 나와 심상하게 나눴던 얘기들 중 전 직장에서 자기 사비 써가며 일했다는 얘기가 또 떠올랐다. 어쩌면 케빈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우기는 케빈이 괘씸했나 보다. 사장은 미수금 리스트를 계속 들여다 보다, 케빈과 연루된 외부 에이전트 라이언의 미수금들 중 회사 불용 자재를 매각했는데 받지 못한 미수금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불용 자재를 라이언에게 넘긴 시점은 재활용 원료 대금을 결제한지 몇 주 전이었다.

당시까지 불용 자재 매각은 케빈에게 맡겼었다고 한다. 불용 자재 절반을 넘기면 선금 50%를 결제 받고, 나머지를 넘기고 잔금 50%를 받는 방식이었다. 문제가 발생한 시점엔 불용 자재 절반을 넘겼지만 선금 50%가 들어오지 않아, 사장이 나머지 절반을 넘기지 말라고 막았다. 그 후 시간이 지나도 선금 50%가 들어오지 않아 라이언 앞으로 미수금이 된 거였다.

라이언에게 연락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라이언이 회사로부터 불용 자재를 받아 넘겼던 업체가 바로 재활용 원료 구매처였다. 거래 방식은 회사와는 반대로, 선금을 먼저 받고 불용 자재를 넘기고, 다시 잔금을 받고 불용 자재를 넘기는 식이었다. (중간에서 묶이는 돈 하나 없이 꿀을 빨고 있었다.) 라이언은 선금이든 잔금이든 받는대로 케빈에게 전했다. 그런데, 문제가 됐던 시점엔 잔금을 이미 받았는데 우리 회사로부터 나머지 불용 자재가 넘어오지 않았고, 재활용 구매처가 자재를 넘기든 돈을 돌려주든 하라고 독촉했다.

 

그 다음 스토리는 뻔했다. 케빈은 30만 개 오더를 명목으로 재활용 원료 구매처에 원료 발주를 넣었을 것이다. 딱 구매처에 치뤄야할 잔금 액수 만큼.

그 후 대금 영수증을 회사에 제출해서 장부에 입력한 후, 영수증을 다시 빼서 구매처에 찾아가 이 돈으로 상쇄하자고 했을 거다. 몰래 빼내온 게 뻔한 회사 결제 영수증을 근거로 개인 채무 변제로 삭감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테니, 구매처 입장에서는 영수증에 케빈의 자필 각서를 받아서 보관했을테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제할 인간이 아니라는 판단도 있었을 거다.

 

케빈이 어째서 내가 외부 컨설팅에게 불용 자재 권리를 넘긴다고 고문에게 직보를 해서, 조용히 퇴사하겠다는 나를 저격했는지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불용 자재는 그의 먹이였는데 내가 그의 돌려막기를 방해한 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 퇴사할 계획을 내가 사장에게 보고한 걸 가지고 왜 그리 죽일듯이 화를 냈는지도 알겠다. 퇴사 얘기를 꺼내면 당연히 자신과 연루된 미수건을 해결하고 나가라고 할테니, 불시에 튈 심산이었을 거다.

난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채, 케빈의 급소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