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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심장을 가진 허깨비] 2. 새 직장

명랑쾌활 2024. 10. 17. 07:23

 

그 해 말, 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게 됐다.

귀국하기 전 선배형과 송별식 겸 해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 케빈도 왔다.

 

첫 만남에서 6개월이 지났지만, 케빈은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형에게 생활비로 야금야금 빌려간 돈이 1만 달러가 넘었고, 여자친구 집안에서는 능력없는 외국인과는 헤어지라고 종용하고 있다고 한다.

 

케빈은 두 가지 선택지 중에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며 조언을 구했다.

하나는 한국의 중견 업체로부터 투자를 받아 인니에 사무실을 내고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고, 나머지 하나는 원래 일했던 분야의 다른 업체에 입사하는 거였다.

투자 좋지. 개척도 좋고. 업체 대표 명함 폼나고. 성공하면 큰 돈 만질 수 있겠네.

근데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어서 선배형에게 돈 빌려서 생활하는 처지에, 어느 세월에 투자를 받아 언제 집에 돈 가져 가나.

이게 고민할 일인가 싶었다.

 

나는 케빈에게 소문 안좋게 났는데, 어떻게 입사 제의 받았냐고 물었다.

회사 사장이 동종 업계와 왕래가 거의 없어서 자신에 관한 안좋은 소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직원으로는 못들어갈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영업 따다가 업체에 연결해주고 커미션 받는 외부 에이전트 일이라도 할까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연결됐어요. 영업 상담 할 생각으로 갔는데, 그쪽 사장이 생산 쪽에 골치 썩고 있는 문제들 얘기를 하길레, 당장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들 알려줬죠. 그러다 사장이 내친 김에 지금 바로 생산 현장 같이 가자고 해서, 가서 바로 보여줬어요. 어떻게 해결하면 되는지. 그랬더니 입사할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요."

나는 지금 네 처지를 생각해라, 입사하면 당장 다음 달에 월급을 손에 쥘 수 있다며 입사를 권했다.

옆에서 듣던 선배형도 아예 내일 당장 이력서 들고 찾아가라고 부추켰고, 케빈은 그러겠다고 했다.

 

이틀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연말 쯤, 선배형으로부터 케빈이 그 회사에 내년 초부터 출근하는 것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다음 해, 나는 인니에 두 차례 방문했다.

속 편한 여행은 아니었다. 일자리 좀 소개 받을 수 있을까 여기저기 비벼볼 목적이 컸다.

케빈을 다시 만났던 건 두 번째 방문 때였다. 이번 역시 선배형이 케빈을 불러서 셋이 만나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배형이 내게 도움이 될까 해서 만든 자리였다.

케빈은 이제 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 한숨 돌렸다고 했다.

여자친구 쪽 식구들도 헤어지라는 소리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조만간 결혼하게 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선배형이, 그런데 왜 내 돈은 갚지 않냐, 월급 받기 시작하면 나눠서 갚기로 했는데 벌써 8월이라며 타박을 했다.

"정말 죄송해요, 형님. 결혼 준비 때문에 아직 여유가 없어서 그랬어요. 급하시면 지금이라도 갚아나갈게요."

선배형은 결혼식 하고 나면 그 다음달부터는 꼭 갚으라고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선배형이 케빈이 다니고 있는 회사 사정 이야기 쪽으로 화제를 유도했다.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는지, 케빈은 순순히 회사 이야기를 털어놨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당시만 해도 케빈은 의욕이 넘쳤다.

회사는 문제가 많았고, 그 문제들은 자신의 능력을 명확하게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기존에 근무 중인 관리부장이 케빈의 개선 활동들에 반대를 하고 나섰다.

불량 직원 정리, 오더 관리 시스템 개선, 불량 폐기물 관리 시스템 개선 등 활동에 관리부장이 업무 권한 침해라면서 거부했다. 관리부장의 업무 영역이 맞으니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했다.

대신 신규 고객사 오더를 따오기 시작했는데, 생산이 따라오지 못해 납기가 늦어지면서 고객사로부터 욕을 먹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영업이 큰 소리 칠만 한 사안이라 관리부장에게 따졌고, 서로 얼굴도 제대로 안볼 정도로 갈등이 심해졌다.

명분은 케빈에게 있었고,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관리부장은 후임이 있다면 회사를 그만 둘 마음이 있다고 사장에게 얘기한 상황이었다.

이야기 끝에 케빈은 내게 자신의 회사에 입사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직급은 자기 아래가 될 것이고, 급여도 전직장보다는 조금 낮아질 거라고 했다.

나도 앞뒤 재고 뺄 상황이 아니었으니, 순순히 응낙했다.

 


사흘 후, 케빈의 회사 사장과 면접 겸해서 저녁식사를 했다. 자리는 무난하게 끝났고, 입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회사 대주주인 고문의 반대로 입사는 무산되었다.

알고보니 관리부장은 사장의 경영 부진을 해결하고, 사장을 견제하고자 고문이 채용한 사람이었다.

별 성과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몇 달 후 12월, 케빈은 현지인 여자친구와 결혼했다고 소식이 왔다. 선배형도 결혼 후에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다음 해 1월, 나는 인니 다시 들어갔다. 이번엔 잠시 다니러 온 게 아니라, 중부 자와의 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1년 계획으로 입국했다.
중부 자와 넘어가기 전에 찌까랑에 들러 선배형을 만났고, 저녁을 같이 먹는 중에 선배형의 연락을 받은 케빈도 합류했다.

케빈은 자신과 부딪히던 관리부장이 퇴사를 했다며, 이번에는 반드시 입사할 수 있으니 면접을 보자고 권했다.

케빈의 권유에 따라, 사장과 다시 면접을 봤다.

사장은 입사를 결정하며,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나이에 관계없이 직급에 따른 상명하복 준수였고, 나머지 하나는 회사의 모든 업무는 영업부 중심으로 진행한다는 점이었다.

이후, 회사 고문과 면담할 때, 고문 역시 직급에 따른 상명하복을 강조했다. 이전 관리부장과 케빈의 충돌이 심해서 회사 분위기가 안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이도 많고 상급자인 관리부장과도 다툼이 있었는데, 하급자를 또 연장자로 채용하게 되면 문제가 될 소지가 많아서 예전의 내 입사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면접 보기 전에, 사장과 고문이 상명하복을 강조할 거라며 케빈도 귀띔했던 사항이다. 자신에게도 존댓말을 꼭 써줄 것을 당부했다.

하급자에게도 말을 낮추지 않는 문화도 있는데, 나이가 만든 적든 상급자에게 존칭 쓰는 게 뭐 그리 어려운가, 너무 심각하게 강조하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그날 점심을 먹고 사장과 캐빈, 나 셋이서 담배 타임을 가졌다.

나는 케빈에게 존댓말을 쓰는데, 케빈이 내게 반말을 했다. 나도 그렇지만, 사장도 당황했는지 한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사장은 캐빈과 내가 형동생 하는 사이인 걸 알고 있었고, 사장 스스로도 하급자에게 말을 놓지 않는 스타일이다.

케빈도 싸한 분위기에 당황한 눈치였다. 사장은 못들은척 먼저 자리를 피했다.

왜 반말까지 써가며 무리를 하냐고 케빈에게 물었다. 케빈은 자기도 어색한데 위계질서 때문에 일부러 그랬다고 했다.

해명이 더 이상했다.

회사 조직에서 하급자에게 반말하는 건 위계질서와는 상관없다. 그러는 사람은 기질 자체가 가볍거나,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반드시 말을 놓아야 한다는 학교나 군대 수준의 상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다. 위계를 잡겠다는 목적성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반말을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그래야 하는 조직은 특수한 집단이다.

원래 기질이 그랬는데 내가 사람 잘못본 건가, 회사 조직 생활 경험이 별로 없는 건가.

이상했지만, 아마 사장과 고문이 상명하복 이슈를 예의 주시하고 있어서, 케빈이 과잉 반응한 게 아니었나 하고 넘어갔다.



입사 후 파악한 회사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았다. 생산 불량이나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자에 대한 문책 조치가 없었다.

생산성 역시 최악이었다. 동종업계가 통상 5일이면 끝날 일이 10일이 걸렸고, 그렇게 순차적으로 작업 스케줄이 밀려, 배송이 2주 정도 늦는 경우가 허다했다.

영업부 직원들은 평상시 생산 진척도를 체크할 생각이 없고, 고객사 컴플레인이 오는 건만 그제서야 문제를 확인했다. 그나마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책임을 회피할 구석을 찾기 위해서였다. 문제가 터지면, 서로 탓하기 바빴다.

케빈이 오더를 따와도 품질이나 배송 사고가 터져 오히려 케빈이 욕을 먹는 상황이었다. 케빈 휘하 영업부 최고참 직원은 대인관계에 서툴러 고객사와 불필요한 다툼을 일으켰고, 고객사에서 온 오더를 메일 확인을 놓치고 지나쳐 날려먹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관리의 부재 상태에서 비롯된 총체적 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