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시스템 문제로 불거진 백신 접종 혼란

명랑쾌활 2021. 8. 30. 12:24

인니 백신 접종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가장 알려진 방법은 쁘둘린둥이 Pedulindungi 라는 스마트폰 앱을 받아 예약을 하고, 정해진 장소로 가서 접종하는 방법입니다.

* peduli 신경쓰다 + lindungi 보살피다

버그가 많아서 작동 불량이나 오류가 많아서 별 한 개 최악의 평점을 받는 앱입니다.

하지만, 백신 접종 증명은 반드시 이 앱을 통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할로독 Hallodoc 이라는 앱도 있습니다.

원래 의사 연합에서 내놓은 의료 서비스 앱인데, 쁘둘린둥이와 연계하여 백신 예약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앱도 역시 버그가 많아서, 백신 여유가 있다고 떠서 예약하려고 하면 이미 다 찼다는 메시지가 뜨는 등 에러가 빈번합니다.

 

전국민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각 동네 통장들에게 접종 분량을 할당하고, 통장이 관할 주민들을 중 접종 대상자를 정해서 정해진 일시와 장소로 가도록 하는 겁니다.

통장을 통해 주민들을 통제하는, 가장 인니스러운 방식입니다.

 

전 외국인이라 저 세 방식 중 할로독을 통해 접종하는 방식으로 접종이 가능합니다.

몇 번 시도해봤다가 너무 엉망이라 걍 포기했지만요.

백신 접종한 한인 교민들도 많은 거 보면, 제가 모자란 모양입니다. =_=

 

지인이 세 번째, '기본적인' 방법을 통해 접종 예약을 했다고 해서 차로 데려다 주면서 같이 가봤습니다.

통장에게 문의하니, 몇날 몇시까지 어디라고 가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예약표나 접수증 따위 없습니다. 통장이 명단에 등록해둘 것이니, 주민증만 가지고 가면 된다고 합니다.

느낌이 쎄합니다. 제 경험상, 인니 시스템 수준으로는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을텐데요.

 

 

통장이 알려준 접종 장소입니다.

차로 30분, 오토바이로 국도를 통해 가면 거진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대형 쇼핑몰입니다.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있으니 맞게 온 거 같아 보이지만, 글쎄요...

제 촉에는 딱 봐도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인니에 다년간 살면서, 이런 상황에 맞겠거니~ 하면서 무작정 기다리다가 헛물 켠 적이 수두룩 합니다.

이럴 땐 무조건 알만한 사람 붙잡고 물어봐야 합니다.

저도 한국 살 적에는 아무나 붙잡고 뭐 물어보는 거 창피해했는데, 인니 살면서 싹 고쳤습니다. ㅋㅋ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니, 여기 아니랩니다. 원래 여기였다가 취소됐다네요.

그러면서, 인근에 있는 주민보건센터로 가보랩니다.

 

혹시 몰라 다른 곳에 있는 주자 요원 붙잡고 확인했습니다.

인니는 상황에 따라 한 사람만 붙잡고 물어본 거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되거든요.

인니 문화에서는 '잘 몰라도 아는척'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게 예의라서요. -_-;

비록 모르지만, 딱 잘라 모른다고 답하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태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어쨌든 주차 요원도 같은 말을 합니다. 여기서 접종하는 건 취소됐다네요.

 

차로 30분이나 걸려서 온 게 아까워서 인근에 있다는 주민보건센터로 가봤습니다.

주민센터까지는 다시 차로 10여 분 걸렸습니다.

 

 

도로변에 잔뜩 주차된 차량들과 바글바글한 사람들 때문에 일대가 난리도 아닙니다.

차량이 1분에 두 걸음 정도 밖에 움직이지 못합니다.

백신 맞겠다는 사람들이 건물 바깥까지 빙 둘러서 다닥다닥 붙어 줄을 선 광경을 보니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없던 병도 걸릴 판이고, 지금 저 줄에 합류하면 접종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입니다.

인니 사람들이 한국인에 비해 원체 손이 느린 편인데, 더군다나 백신 접종은 서둘러 처리할 일이 아니니까요.

 

조금만 더 진입했다가는 보건센터를 둘러싼 일방통행 구간에 들어서기 때문에, 차 돌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정체 행렬에 갖힐 판입니다.

그러면 또 빠져나오는데 30분이 걸릴지 한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입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100m 거리를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 빠져 나온 경험이 세 번 있습니다. 20~30분 걸린 적도 많고요.)

지인에게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 말하고, 잽싸게 차 돌려 역주행 해서 빠져나왔습니다.

통제하고 있던 경찰이 있었지만, 역주행으로 빠져 나와도 뭐라 잡지 않습니다. 이런 인니 특유의 유도리는 장점이기도 합니다. ㅎ

 

 

애초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입니다.

차로 30분 거리에 떨어진 마을 주민들 접종 계획을 통장을 통해 전해서 집결하게 했다는 건, 최소한 접종 장소로부터 반경 30분 거리 이내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접종 장소로 몰려 오는 걸 통제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단일 전산 시스템을 통해 해당 일자의 예약 수량을 쌍방향으로 관리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일선 통장들에게 지급되었을 리 없습니다.

각 마을 통장들은 기껏해야 관할 주민들 중 접종 예약자 명단을 '일방적으로' 신고할 뿐일텐데, 그럼 명단 등록한 사람들 모두가 몰려올 게 뻔합니다.

주민 입장에서는 통장이 등록했다니까 일단 가는 수 밖에요.

그야말로 서너 시간 기다리는 정도는 대단한 일도 아닌 인니다운 일처리입니다.

일단 다 와, 줄 서, 기다려, 되는 사람은 맞어, 안된 사람은 다음에 와, 뭐 이런 거죠.

백신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이렇게 시스템이 후진적이어서야 무슨 소용일까 싶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처음 갔던 쇼핑몰에서 백신 접종 기다렸던 500여 명 정도가 헛걸음을 했다는 소식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한국이라면 공중파 뉴스에 나올 사건이지만, 인니에서는 그저 소셜 미디어 이슈 정도입니다.

최소한 쇼핑몰 정문에 취소됐다는 사실 정도는 크게 써붙여 안내할 만도 한데, 인니는 그정도도 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쇼핑몰을 임시 접종장소로 정한 공무원 입장에서는 쇼핑몰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런 거 써붙이라고 지시할 정도 위치의 쇼핑몰 관계자 입장에서는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 난리통을 뻔히 보고 있는 일선 근무자들 입장에서는 권한도 없고 책임도 없는데 괜히 나서기는 꺼려지는 남일이니까요.

한 국가의 시스템이란 건, 머리 좋은 몇몇 사람이 이래저래 지시하고 뜯어 고친다고 개선될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국가 구성원 전체 수준이 올라야 가능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