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제법 좋은 편입니다.
뇌가 썡쌩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엔 집중해서 책을 보면 사진처럼 기억하기도 했었어요.
책의 내용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페이지의 문단 배치나 문장 줄이 바뀌는 것, 삽화 위치 등등을 그야말로 사진처럼 기억하는 거지요.
'보이는 것'을 기억할 정도로 능력자는 아니었지만, '본 것'은 거의 대부분 기억했어요.
지금은 뇌가 담배와 술로 절어 버려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아직도 종종 어떤 상황에 '어, 이상하다'라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순간, 기억한다는 자각은 없었어도 나중에 그 일들이 꽤 또렷이 떠오르곤 합니다.
아쉽게도 자의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맘대로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초능력처럼 활용할 수는 없지만요.
차라리 '어, 이상하다'라고 느끼는 순간을 바로 자각하는 능력이 있다면 더 유용하겠네요.
기억력이 좋다는 게 꼭 장점이라고만 볼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각양각색 사람들의 수많은 개성 중 하나라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령 누군가와 니가 그 말을 했느니, 내가 언제 그랫냐느니 말다툼 할 때 쓰긴 합니다만, 그리 '유용하진' 않습니다.
이기는 것에는 쓸모 있지만, 사실 말다툼이란 게 이겨봐야 득도 없잖아요.
오히려, 고작 말다툼 따위로 상대방의 반감이나 원한을 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당시 나눴던 말을 토씨 하나 안틀리고 따박따박 말하면서, '난 정확하게 알고 있고, 넌 지금 왜곡된 기억을 말하고 있어'라는 태도로 상대방을 압박하니, 얼마나 재수 없어 보이겠어요.
상대방도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그 당시 상황이나 자기가 했던 말을 '정말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요.
차라리 저나 상대방이나 둘다 확신이 없으면서 다퉜으면, 진실은 밝혀지지 않겠지만 심하게 감정 상하지 않고 끝났겠지요.
그런 말다툼 따위 진실 밝혀지는 게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고요.
자기 편한대로 기억하거나 기억을 왜곡한다는 점, 기억이 진실에 우선한다는 점, 만약 진실이 자신에게 불편하다면 거짓이라고 부정한다는 점, 자기의 기억이 잘못 되었다고 알려주면 적대적으로 반응한다는 점... 대부분의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걸 이해를 하고 받아 들이게 된 건 30대 후반이 되어서입니다.
그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저를 별 걸 다 마음에 담아두는 뒤끝 더럽고 쪼잔한 인간으로 봤거나, 지 말만 맞다고 우기며 남을 깔아 뭉개는 재수 없는 인간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제가 밥맛 없는 인간이었던 건 좋은 기억력 덕분입니다. ㅎㅎ
기억력이 좋은 덕분에 괴로운 것들도 있습니다.
나 편리한대로 왜곡해서 기억하면 마음이 편할텐데, 스스로 했던 병신같은 짓들도 고스란히 기억을 해서, 가끔 이불킥을 합니다.
자신의 못난 면을 보는 건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받아들이는 건 더더욱 그렇고요.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예가 있을까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소아마비인 동급생이 토한 걸 치우면서, 면전에 대고 "아이 씨, 왜 내가 주번일 때 토하고 그래."라고 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그 때 그 장소, 상황, 평소 순해서 화 한 번 낸 적 없던 소아마비 동급생이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노려 보던 그 모습, 그 모습에 잔뜩 쫄아버린 나를 사진처럼 기억합니다.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기억이 가끔 문득 떠올라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냥 좀 잊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리 되지 않네요.
가끔은 자기 맘 편한대로 기억을 왜곡하거나, 잊어 버리는 능력이 부럽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기억력이 좋다는 것도 꼭 좋은 것만도 아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