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장에 있는 자재들 빨리 치우세요."
국순 본사 소속 전성만 차장은 창고 사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인사도 없이 최준영에게 잔뜩 인상을 쓰며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네? 뭔 자재를요?"
뜬금 없는 말에 최준영은 되물었다.
"인도장에 있는 자재들이요. 언제까지 저렇게 방치해 둘 건데요?"
창고 관리자가 자재들 파악도 안했냐는듯, 전성만 차장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듬뿍 배여있었다.
비로소 뭔 소리인지 이해한 최준영은 대답했다.
"그 자재들은 저희가 관리하는 자재들이 아닌데요?"
인도장은 창고의 자재들을 생산 쪽에 넘길 때 제품 종류와 수량이 맞는지 상호 검수하는 공간이다. 생산 부서와 창고 부서의 중립적인 공간이지만, 창고 부서 입장에서는 생산 부서가 요청한 자재들을 인도장까지 갖다 놓고 검수 확인 하면 끝이기 때문에 생산 부서의 공간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생산 부서에서 요청을 하지 않은 자재가 인도장에 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생산 부서에서는 인도장을 자기들 창고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자꾸 이쪽 일이니 저쪽 일이니 회피하실 거예요? 애초에 그쪽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잖아요."
전성만 차장은 한층 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보아하니 상황 제대로 파악도 안하고 저 지랄을 하는 것 같았지만, 창고 외주 관리자인 최준영은 을 입장이니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차장님. 제가 뭘 또 회피한다고 그러십니까. 저희 잘못 아니니까 안한다는 게 아니라, 저희가 관리하는 자재가 아니니까 못한다는 거잖아요. 차라리 생산팀에 사람이 없어서 수습 못하니까 저희더러 처리 좀 해달라고 하는 거면 정리는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잘못이라고 수습하라고 하시는 건 좀 너무하시네요."
"아니, 잘못한 게 없다고요? 애초에 생산에서 요청한 자재 수량보다 더 많은 수량을 올렸으니 저렇게 남은 거 아녜요. 제대로 줬으면 저게 왜 저렇게 남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왔다.
국순의 베트남 본사 소속인 전성만 차장은 당연히 인니어를 전혀 못했다. 영어 할 줄 아는 현지인 중간 관리자의 통역을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공장 한 바퀴 돌아 보다가 인도장에 엉망으로 쌓여 있는 자재를 보고 통역을 통해 담당 직원에게 뭐냐고 물었을 것이다. 인도장 담당 직원은 되도 않는 변명을 했을 테고, 통역을 거치면서 내용이 더 모호해진 그 변명을 전성만 차장이 곧이 곧대로 믿고 최준영에게 와서 다짜고짜 따진 것이다.
전성만 차장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인도장에 쌓인 자재들은 실은, 생산 계획이 뒤로 밀렸거나 취소되어 절차대로라면 창고에 반품해야 하는데 인도장에 쌓아 둔 것들이다. 생산 계획 부서 직원이 생산할 제품과 무관한 자재들을 잘못 주문해서 받아 놓고, 그대로 인도장에 방치한 자재들도 있었다.
귀찮아서 절차대로 반품하지 않은 게 아니다. 불량 나서 자재 빵구나면 땜빵 용도로 갖다 쓰려고 일부러 인도장에 쌓아 둔 거다. 한국인 관리자들이 절차 무시하고 감정적으로 난폭하게 나오니, 현지인들도 피하려고 머리를 쓴 결과물이다. 어차피 한국인들도 자기 일에 치여서 그때 그때 상황만 넘기면, 신경 거의 안쓰니까 괜찮다. 후진국의 학력 낮은 사람들이 아는 건 부족할 수 있어도 멍청하진 않다.
"차장님, 상식적으로 저희가 요청하지도 않은 자재를 넘길리가 없잖아요. 나중에 자재 없어졌다고 저희 책임이 될텐데요. 지금 인도장에 있는 자재들은 생산팀에서 요청한대로 수량 맞춰서 넘긴 자재들입니다. 왜 필요 수량보다 더 요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는 거 저희한테 반품하지도 않고, 생산팀에서 인도장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빼다 쓰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맘대로 치울 수가 없다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어떤 자재는 쓰고 있고, 어떤 자재는 안쓰는지도 생산팀 밖에 몰라서 저희 맘대로 정리도 못해요."
잔뜩 인상 쓰고 있었던 표정을 풀면 자기 권위가 우습게 되기라도 하는듯, 억지로 유지하며 최준영을 노려보는 전성만 차장의 얼굴은 볼 만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확인해 보고 다시 말씀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전성만 차장은 홱 자리를 떴다.
두어 시간 후, 전성만 차장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 자재 관리 문제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배를 탔어요.
- 잘 좀 부탁 드립니다.
- 아까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시고요.
마음에 두지 마시라... 이런 걸 사과로 받아 들여야 하나? 뭔 놈의 사과를 해라, 하지 마라 요구처럼 하지? 그 대단하신 갑께서 이렇게라도 표현해 주시는 걸 황송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살다 보면 잘못 할 수도 있는 거고, 잘못했으면 사과하면 될 일이다. 사과한다고 해서 인격이 손상되는 거 아니다. 하지만, 갑으로서의 권위와 체면이 그렇게도 중요한 사람에게는 사과의 방식도 복잡한가 보다.
죽어서 위패에 쓰지도 못하는 민간 회사 차장 자리가 뭐 그리 소중하고 대단한 권위인지, 세상 참 각박하고 어렵게 산다 싶어서 최준영은 웃음이 피식 났다.
- 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내 답문자에 또 자존심 상했으려나?
을 주제에 건방지게, 감히 자기에 대해 뭘 이해한다고 하냐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