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 인증부터 설명 해야겠군요.
미주 쪽으로 수출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요.
UL 인증 마크
UL은 Underwriters Laboratories의 약자로, 미국의 공산품 안전성 테스트 및 관리 인증 비영리 민간단체입니다.
뭐, 한국의 KS마크랑 개념이 비슷한 겁니다.
민간단체라 딱히 필수적으로 인증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역사가 깊고, 신뢰도가 높아서 미국의 관공서, 업체, 소비자까지 모두 원하기 때문에, 미국에 물건 팔고 싶으면 인증은 사실상 필수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만큼, UL 인증의 수요도 전세계적이어서, 세계 각국에 UL 지사가 있습니다.
대상에 따라 테스트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규격을 정해주고, 규격에 맞는 재료나 부품을 사용하는지 정기적인 실사를 통해 관리하며 인증해 줍니다.
UL 심사 및 업체 인증 등록 비용은 1만달러 정도로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하지만 본사가 인증을 받고, 해외 지사를 산하로 등록하는 경우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UL인증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본사가 이미 인증 받았기 때문에 산하로 등록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죠.
이미 중국 지사를 산하 등록했던 일도 있어서 별 일 없이 진행될 거라 예상했습니다.
본사에서 한국 UL을 통해 모든 절차를 완료했으니, 인니 UL에 리스트 업 통보가 가면 실사 후 등록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인니 UL에 연락하니 등록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됐으면 안됐나보다 싶을텐데, 이 담당자라는 사람이 엉뚱한 얘기를 합니다.
"인도네시아는 다른 나라와 시스템이 달라서, 지사로 등록할 수 없고, 꼭 독립적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인니가, 전세계 어느 나라의 공사도 완공 예정일을 어겨본 적이 없었던 (심지어 인도에서도!) 모모기업이 최초로 예정일을 넘기게 만든,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대단한 나라라지만, 이건 좀 아니지요.
인증 절차는 회사 내부 시스템의 문제이고, 나아가 경영의 문제인지라, 국가 특색에 따라 침해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인니 공무원이 아무리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회사 내부 절차를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일 빡세게 시킨다고 무단결근하고, 괜히 꼬투리 잡아 우~ 몰려와서 데모해서 공사 못하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도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을걸, 1만달러나 들여야 하다니요.
어쨋든 알았다고 하고, 한국에 답변을 전했습니다.
한국 UL 측은 모든 절차가 정상적으로 끝났고 그럴리가 없으니, 산하 등록을 할 수 없다는 인니 UL 측의 답변을 서면이나 이메일로라도 받아서 보내달라고 합니다.
다시 인니 UL의 그 담당자에게 한국 UL 측 요청을 이메일로 통보했으나 답장이 없어, 전화를 했습니다.
그 담당자는, "자신은 그런 부분을 서면으로 보내 줄 권한이 없는 위치다. 전산 등록 여부를 확인하는 담당자 연락처를 가르쳐 줄테니, 전산 등록이 됐는지 직접 확인해 보라."는 요상한 동문서답을 합니다.
권한도 없다는 인간이라면 왜 나서서 인니는 안됀다, 독립적으로 해라, 그런 소리를 지껄였는지도 말이 안되고, 그럼 그걸 서면으로 보낼 권한이 있는 인간 연락처를 가르쳐 줘야지, 왜 뜬금없이 전산 확인 담당자 연락처를 갖다 붙이는지.
말로는 할 수 있지만, 그걸 글로 쓸 수는 없는 경우는 뻔하지요.
쓸 데 없는 핑퐁으로 일주일이나 까먹었습니다.
결국 (단순한 의사소통이 아닌) 말이 통하는건, 같은 한국인 뿐입니다.
한국 UL측에 완료되었다는 통지서와 전산 등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화면 캡쳐를 요청해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니 UL의 그 빌어먹을 담당자에게 보내고 연락했습니다.
"한국 UL에서 정상적으로 절차가 끝났다는 증빙자료를 보냈으니 확인해라. 이미 일주일 전에 완료됐다. 산하 등록이 되는지 안되는지 여부를 정확히 말해달라. 글로 쓰지 않아도 좋다. 만약 안된다면 한국 UL이 거짓말을 한 것이니, 당신의 이름과 답변을 근거로 정식으로 한국 UL에 컴플레인 하겠다."
5분쯤 후에 그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확인해보니 일주일 전에 등록된 것이 맞다. 그런데 나에게 통지가 와야 하는데 다른 직원에게 통지가 가서 확인이 되지 않았던 거다. 내일 실사 가겠다."
전산 등록 조회와 통지가 뭔 상관일까요?
인니 UL의 전산 시스템은, 통지를 받아야 비로소 등록 사실 조회가 가능한가 봅니다. 허허...
인니에 부패가 만연하다 못해, 이미 당연한 관행이 된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글로벌 표준으로 운영되는 민간단체 마저도 이 모양인거 보면 참으로 심각합니다.
처리를 해야 한다는 직무가, 처리를 안해주면 니가 곤란하다는 권한으로 변질되어 돈을 짜낼 구실로 악용되는 구조는, 인니에서는 이제 흔하디 흔한 정형이 된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정형을 고착화된 배경엔 조직 집단의 보복이 있습니다.
미국 본사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할 경우 그 담당자는 징계를 받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갖은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히겠지요.
정작 잘못한 것은 그쪽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건 이쪽인데도요.
인니어에는 자긍심, 영어로는 pride라는 단어와 의미가 100% 일치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인니어에 대한 배움이 깊지 못해 조심스럽지만, 알고 있는 바를 근거로 얘기해 봅니다.)
가장 뜻이 근접한 단어가 kebanggaan 입니다.
자긍심, 또는 긍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뜻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자긍심은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지는 마음',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입니다만, kebanggaan은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이는 마음', '남들 보기에 자랑스러울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이 실제로 어떻다기 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합니다.
비슷한 예로, 한국어의 수치심, 부끄러움에 해당하는 단어 malu가 있습니다.
자긍심-kebanggaan 보다는 좀더 뜻이 일치하지만, 역시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수치심, 부끄러움은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쓰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 '남들 보기 부끄럽다'처럼 수식어를 덧붙입니다.
malu는 의미 자체가 '타인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입니다.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라고 말하면, 인니인들은 이해를 못하더군요.
그러다보니, 한국인의 보편적 개념에서 수치심은 자결, 뉘우침, 반성 등을 연상하는 편인데, 인니인들에게 malu는 복수, 보복을 연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떳떳치 못한 행동을 한 탓에 부끄러운 상황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 사람이 내 행동을 타인들에게 발각되게 한 탓에 부끄러운 상황이 됐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인니인들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질책을 받는데, 자신의 잘잘못 보다 그 잘잘못을 남들이 보는 곳에서 질책하느냐 아니냐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잘못을 보는 순간 버럭버럭 큰 소리로 질책하는 일이 흔한 한국 조직 문화와는 상극이지요.
언어는 그 지역의 사회와 문화, 역사의 거울입니다.
두 단어를 놓고 보았을 때, 인니의 문화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니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어떤 서양학자는, 표리부동이야 말로 인니인들이 목표로 삼는 내적 상태라고 하더군요.
이를테면, 인간이니 화가 나는게 당연하지만, 그 화를 내색치 않고 은연 중에 깨닫도록 하는 행동이 존경 받는다는 겁니다.
일본의 혼네, 다떼마에와도 유사하지요.
화를 내색치 않기 위해서, 아예 화가 나지 않도록 마음을 수양한다는 한국 성리학과 근본적인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이상을 근거로 본다면, 제 생각에 일리가 있다면, 인니에서 부패가 사라지긴 요원한 일일거 같습니다.
부패는 스스로의 도덕심 문제인데, 남들에게 들키지만 안는다면 자긍심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또한 항의나 처벌을 받아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렇다는 생각 보다는 그것을 발각되게 한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조직 차원에서 보복하는 것을 정당화 할테니까요.
아마도 그 빌어먹을 인니 UL 담당자는 자신이 했던 말이 완전히 뒤집어진 상황이라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제가 UL에 항의를 해서 공론화를 시키면 그제서야 수치심을 느끼겠지요.
그리고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든 대상에게 보복을 가할테구요.
한편으론 부패가 꼭 사라져야 하는건가 싶기도 합니다.
그 빌어먹을 담당자가 부패했다는건, 실사나 관리 등의 업무에 있어서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무마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인니가 사랑해는 내 조국도 아닌데, 부패로 인한 사회적 비용으로 발전을 못하든 말든 별 상관없지요.
그들이 불의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을 불의라고 비난하면서 정의의 응징을 하는 것도 우습구요.
뺨 때리는게 너무 당연한 인사법인 나라에 산다면, 뺨 때린다고 화 내봐야 뭐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