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장과 면담 자리에서, 케빈을 사적으로 만나지 않고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장 역시 기다렸다는듯, 그렇다면 확인을 좀 하고 싶은게 있다고 화답했다.
내가 케빈이 추천해서 입사한 사람이다보니 그동안 묻기 꺼려졌던 모양이었다.
사장은 라이언이 도대체 누구인지 아냐고 물었다.
공장장이 직통으로 오더를 주고 받았다니, 누구인지 궁금할 게 당연했다.
케빈의 전 직장 출신이라고 말했다.
사장은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덧붙여, 케빈이 내년 초 쯤에 사직할 생각인 것 같다고 말헀다.
다음 날, 고문에게도 사장에게 말한 내용들을 밝혔다. 아울러 사직 의사도 밝혔다.
나 추천한 사람 모함해서 살 길을 도모하는 모양새로 비쳐지고 싶지 않으니, 사직하는 게 마땅하다고 말했다.
고문은 나의 사직은 나중에 얘기하자고 보류했다.
그 다음 날, 고문이 케빈을 본사로 호출했다는 사실을 케빈이 내게 전화 해서 알았다.
케빈은 고문이 왜 자기를 불렀는지 혹시 아냐고 물었다. 예의 사람 떠보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고문이 뭔 생각을 하는지 내 알 바 아니고, 미리 알면 뭐 달라지는 게 있냐고 했다.
본사에 온 케빈은 고문의 방으로 들어가 1시간 쯤 있다가 나왔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
케빈은 잠깜 얘기 좀 하자며 나를 따로 불러냈다. 칼눈을 뜨고 말 없이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케빈은, 자기가 원래 돌려 말하는 거 잘 못하니까 바로 물어보겠다며, 자기 회사 그만 둔다는 얘기를 고문에게 했냐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왜 그랬냐고 묻길레, 그럼 넌 외부 컨설팅 문제를 고문에게 직보로 얘기했냐고 되물었다.
케빈은 그 사람들 사기꾼이라, 회사 손해 보는 거 막으려고 그랬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은 이유로 그랬다고 했다.
케빈은 나를 지긋이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그날 저녁, 고문의 지시로 모두 회식에 참석하게 됐다.
케빈은 자기 차량은 따라오게 하고, 내 차량을 함께 타고 회식 장소로 갔다.
아까 일은 없었던듯,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를 회사에 소개했던 일, 회사 상황 개판이었던 일, 지사 일 등등
조근조근 대화하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빈도 아마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케빈에게 나 그냥 조용히 나가게 내버려 두라고 했다. 2년 동안 지켜 봤으면 나 어떤 놈인지 이제 알 거 아니냐고 했다.
케빈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형님, 형님은 제가 회사에다 형님에 관한 얘기 뭘 까면 가장 치명적일 거 같으세요?'라고 물었다.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지긋지긋 했다.
나라고 잘못한게 없기야 하겠냐만, 딱히 회사 잘릴 정도로 나쁜 진 한 기억은 없다고 했다.
다시 30여분이 지나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즈음 케빈이 다시 한 번 또 같은 질문을 했다.
협박을 던지고 반응을 살피는 모양이다. 사람이 아니라 뱀 같이 느껴졌다.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을 것들은 이미 사장과 고문에게 다 오픈했으니, 까서 네 마음이 후련할 거 같으면 맘대로 하라고 했다.
기껏해야 전 직장 총무와의 관계나 재스민과 교제 중이라는 정도일텐데, 실제로 사장과 고문에게 이미 얘기했다.
비밀이 약점이라면, 비밀이 아니면 약점이 아니게 된다.
회식 자리에서 고문은 케빈에게, 지사에 들여놓은 설비의 오더 때문에 지사 지켜보고만 있는 거라며, 그 오더 받아오고 나서 퇴사 문제를 논하자고 했다.
회식 파하고 고문과 사장을 배웅한 후, 케빈은 나와 생산 총괄을 쳐다보지도 않고 떠났다.
평소 날카롭던 고문이 유예 기간을 줬으니, 케빈은 한 고비 모면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평소 허허 하던 사장은 그렇지 않았다.
케빈을 채용하고, 전폭적으로 권한을 일임하고, 미심쩍은 상황에도 신뢰했던 사장의 배신감은 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