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을 처음 만났던 건 10년 전, 리뽀 찌까랑의 한 이자까야에서였다.
평소 아주 가깝게 지내는 선배형과 둘이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한 자리였는데, 선배형이 케빈을 데려왔다.
똑똑한 친구인데 일이 잘 안풀려서 좀 어렵게 지내고 있다며, 서로 알아두면 도움이 될까 해서 불렀다고 했다.
선배형은 성격이 까칠했고, 명석하지 못하거나 셩격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사적으로 벽을 세우는 사람이다. 나와는 마음이 맞아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시간 맞으면 두세 번일 정도로 자주 만났지만, 모르는 사람을 소개시킨다고 데려온 적은 처음이었다.
꽤 마음에 들었나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캐빈과 인사를 나눴다.
케빈은 친화력이 매우 뛰어났다. 나보다 세 살 밑이었는데,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말을 놓지 않는 내가 처음 만난 그 날 호형호제를 텄을 정도다.
특히,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질문을 잘 포착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쭐하고 흡족함을 느끼게끔 대화를 유도해 나가는 요령이 뛰어났다. 한참 신나서 대화를 하다가 문득, '어라, 내가 왜 이리 업됐지?'하고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영업일 하면 엄청 잘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리자, 선배형은 본론을 꺼냈다.
거래처 영업직으로 알게 됐는데, 현재 직장에서 나와 힘든 상황이라 내가 몇 마디 조언을 해주면 도움일 될 것 같아서 데려왔다며, 케빈더러 내게 얘기를 풀어보라고 했다.
그 날 케빈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지인이 사장인 인니 소재 회사에서 일했다.
처음엔 제품에 대해 배우기 위해 생산 현장에서 일했고, 그 후 영업 업무를 했다.
"사장이 많이 인색했어요. 영업 뛰다 보면 접대할 일이 많은데, 너무 깐깐해서 사비로 한 적이 많았어요. 거래처 사람들과 골프치는 것도 처음엔 지원없다가 나중에야 그나마 라운드비 딱 제 것만 영수증 처리해줬어요. 캐디피나 내기 골프로 나가는 돈은 사비 써야죠. 다들 당연하게 내기 골프를 하는데 전 돈 없어서 안하겠고 할 수도 없고. 골프 끝나고 뒷풀이 계산한 거 금액 많이 나왔다고 깨지니까 반은 사비로 매꿨어요. 거래처 방문할 때 음료수, 현지인 직원들 밥 사주거나 회식하라고 돈 찔러 주고 그런 건 당연히 다 사비고요. "
사장과의 갈등이 커져 결국 퇴직금도 귀국 항공권 지원도 못받고 회사를 나오게 됐다.
"사장과 부딪히는 게 점점 심해졌어요. 제 영업 방식을 계속 지적하는데, 저 실적 진짜 좋았거든요. 영업은 실적 좋으면 됐잖아요. 일 말고 사적으로도 힘들었어요. 회사 기숙사 살았는데, 일요일 아침마다 사장 사택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어요. 전날 접대하느라 새벽에 들어와도 예외 없고요. 예배는 사장이 직접 진행했어요. 예전 다니던 교회 목사랑 싸워서 안다닌다네요."
"제 밑에 한국인 직원들한테도 너무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밑에 직원들이라도 처우 좀 개선해달라고 한 번 팍 얘기했더니, 짤라버리더라고요. 퇴직금도 귀국 항공권 지원도 없이 쫓겨났어요."
"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해고되고 얼마 안돼서 병까지 걸렸어요. 영업한다고 하도 굴러서 몸이 망가졌었나 봐요. 픽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병원에서 치료 방법이 없다네요. 한국 갈 돈도 없어서 사장한테 전화해서 제발 살려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아침에 병원 와서 보더니 비행기표 끊어주더라고요. 사람 다 죽어가는데 냉정하데요. 병원 온 것도 진짜인가 아닌가 확인하려고 온 거 같아요."
"한국 가서 바로 수술해서 겨우 살았어요. 치료비 엄청 깨졌는데, 다 부모님이 어찌어찌 마련해서 냈어요. 사장 본가가 부모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저 수술 받고 치료하는 동안 한 번을 안와더라고요."
캐빈은 어느정도 회복한 후 다시 인니로 왔다.
"결혼까지 할 생각으로 만나는 현지인 여자친구가 있거든요. 해고되기 전에 사귀기 시작했는데, 저 인도네시아에서 쓰러져 입원했을 때도 그 친구가 거의 매일 와서 간호해 줬어요. 근데, 급하게 한국 오는 바람에 제대로 상황 알려주지도 못했 거든요. 그래서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온 거죠."
인니로 돌아오긴 했지만, 생활이 막막했다. 전 진장 사장이 거래처들에 케빈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들을 퍼뜨려서 취직이 어려웠다. 모아둔 돈도 없어서 뭘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자친구와 같이 살았는데, 돈이 진짜 한 푼도 없어서 동전 긁어 모아 라면 하나 겨우 사서 그거 둘이 나눠 먹은 적도 있어요. 하루 종일 그거 한 끼요. 그러다 전기까지 끊어졌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더라고요."
캐빈은 선배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배형이 사는 집을 가봤는데,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선배형이 매월 조금씩 빌려주는 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후로도 케빈을 두어 차례 더 봤는데, 보통 선배형이 약속을 잡아 나와 케빈을 함께 불러내 만났다. 내가 따로 연락해서 만난 적은 없었다.
만남이 늘어나면서 케빈과의 사이는 좀더 가까워졌고,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 사장이 왜 그렇게 잘랐는지 이해가 안가요. 아버지랑 엄청 가까운 사이였거든요."
"사장이 하려고 한 일 안된다고 한 적 몇 번 있었거든요. 지금 하면 돈만 날리고 망하기 딱 좋은 사업이라서요. 어쨌든 사장 하겠다는 거 반대했으니 찍혔던 거 같아요. 거기다 사장도 뚫어보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안된 거래처가 있었는데, 거길 제가 뚫었던 적이 있었어요. 저한테 거기 되겠냐, 어디 한 번 잘해봐라 같잖다는듯이 말했는데, 진짜로 되니까 기분 엄청 나빴을 거예요. 그런 중에 제가 제 밑에 직원들 처우 좀 올려달라고 했는데, 그게 저 자르겠다는 마음 먹게 된 결정적인 이유 같아요."
"그때 쯤에 마침 또 제가 사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때 좀 회사일 소홀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 거 딱 꼬투리 잡아서 해고하더라고요. 한참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냥 바로 척척 진행해버렸어요. 저 한국 가니까, 체류 허가까지 바로 취소해버리고요."
전 직장 사장은 캐빈이 관리했던 거래처 중 중요한 곳들은 일일이 방문해서, 캐빈이 마약을 하는 것 같다고, 마약 중독 때문에 그동안 거래처 대응을 제대로 못했던 거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선배형의 회사에도 찾아와 그랬는데, 평소 남의 험담 같은 건 하지 않는 점잖은 사람이라 선배형이 좀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쪽으로는 어디 들어갈 데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좀 친하게 지냈던 거래처 사람한테 어디 소개해 줄 곳 없냐고 해도 묘한 눈으로 저 대충 얼버무리고. 제가 그래도 예전에 일 잘한다고 자기네 회사 오라고 그런데 많았거든요. 그래도 아버지랑 그 사장이란 관계도 있고, 저 처음 인니 와서 일 가르쳐준 곳도 거기고, 그래서 월급 훨씬 많이 준다는 곳 있어도 그냥 계속 다녔는데. 제가 미련했죠."
인니에서 사업한지도 오래됐고, 연배도 있는 사장이 거래처에 찾아가 자기 회사 직원 험담을 한다? 그것도 마약 중독이라는, 도가 지나친 비난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선배형도 직접 들었다니 실제로 그랬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캐빈에게서는 마약 중독자라고 의심할 만한, 비정상적인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케빈의 전 직장 사장이 심한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을 케빈에게 당했지만, 케빈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고 한 일이라 자각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전제를 하면 전 직장 사장의 과한 적개심도, 사장이 왜 그러는지 캐빈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상황도 설명이 가능하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