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어메이징 인니 대학교 졸업식

명랑쾌활 2023. 2. 10. 11:28

UT 본원

UT Universitas Terbuka

직역하자면 '열린 대학'인 이 곳은 자카르타에 본원이 있고, 인니 전역에 분원이 있다.

재학생 대부분 직장인이고, 학비는 저렴한 편이다.

주로 원격 수업이라 널널하지만, 학점 평가가 빡세서 졸업이 매우 어렵다.

설립 취지도 그렇고, 한국의 국립 방송통신 대학과 여러모로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이제 졸업식 감흥이 예전 같지 않지만, 인니는 아직도 졸업식이 특별한 경사다.

아직까지도 전체 인구 대비 대졸자 비율이 낮은 편이라, 대학교 졸업식은 대단한 경사라 할 수 있다.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한국인이 보기에 이해가 가지 않을 행태가 많다.

 

 

열린 대학 졸업식은 두 차례에 나눠서 진행한다.

먼저 인니 전역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인 졸업 예정자 1,000명을 뽑아 열린 대학 본원에서 거행한다.

먼 지역은 서울에서 일본 거리 정도를 비행기 타고 와야 하지만, 우수자에 뽑혀 초청 받는 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 참석하는 모양이다.

 

그 외 사람들은 각 지역 분원마다 따로 개최하는 졸업식에 참석해야 하는데, 이게 어메이징 하다.

우선 과반별 단톡방으로 참석 여부를 받는데, 졸업식 개최일이 없다. 대략 두어 달 뒤에 있을 예정이라고만 한다.

졸업식은 당연히 평일에 한다.

재학생 대부분이 직장인이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하긴, 인니 회사 분위기는 한국과 달라서 연차나 무급 휴가 받는 게 널널한 편이다.

법으로 보장된 권리인데 눈치보고 써야 하는 한국이 비정상이긴 하다.

 

졸업식 참석 여부는 중요하다.

행사에 빈 자리 이빨 빠진 것처럼 보이는 걸 싫어하는지, 참석자 수에 맞춰 의자를 준비하고 앉을 위치도 정해져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참석하는 사람의 졸업장만 준비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온라인 대학을 졸업한 지인에 따르면, 졸업식 참석 안했더니 3개월 후에야 졸업장을 수령할 수 있었댄다. 심지어 5개월이 지나서 수령한 사람도 있댄다.

지금은 많이 나아져서 졸업식 일주일쯤 후에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

왜 일주일 후에야 수령 가능한지는 석연치 않다. 죤말 할 때 참석해라

 

졸업식 전날, 무려 예행 연습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 직장인이다.)

졸업생 중 유명인사를 불러 세미나를 한다고 하지만 핑계일 뿐이고, 졸업식 예행 연습하자고 소집하기는 뻘쭘하니 쓰는 핑계인 것 같다. 세미나도 엄연히 수업이니 불참하면 불이익이 있다는 협박 수단도 되고.

예행 연습은 엉망이었다.

예정 스케줄은 오전 9시 반에 시작해서 12시 끝이다. 아마 세미나 1시간, 예행 연습 1시간 할 심산이었을 거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3시 반 쯤 끝났다.

세미나 발표자가 지각해서 10시에 도착, 이 미친 눔이 입 신나게 털고 별 쓸 데 없는 질문 다 받아서 입 터느라 12시 반에 끝났다. 스탭이 중간에 끊지도 않고 내비둔 거다.

12시 종료 예정이었으니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서, 참석자들이 알아서 밥 사먹어야 했다.

거기다 대고 점심밥 30분 내 먹고 1시까지 다시 모이라고 공지했다가 거하게 욕 먹고서, 1시 반으로 늦췄다. (순딩한 대학생들이 아니다. 대부분 직장인들이다.)

1시 반부터 예행 연습 시작. 행사 세부 순서들을 꾸역꾸역 곧이 곧대로 다 연습하려다, 빡친 참석자들이 중간 중간 "그건 좀 넘어가라고!" 하며 항의해서 스킵한 덕에 2시간 만에 겨우 끝났다.

예행 연습과 본 행사로 이틀을 휴가 써야 하는데다, 왕복 차비, 식비까지 자비로 내고 쓸데 없는 짓에 동원되다 보니, 사회 경험치 있는 직장인들이 개빡치는 게 당연하다.

 

행사장 입장 전

 

졸업식 당일.

졸업 예정자들은 학교에 오전 7시까지 가야 한다. 집이 멀면 한 밤중에 출발하거나 근처에 숙박해야 한다. 졸업식이 뭔 일생의 영광이라도 되나 보다.

내 여친 졸업식 당시 졸업생은 1,165명이었다고 한다.

졸업식 당사자만 행사를 하는 강당 안에 입장할 수 있다.

졸업자는 행사 중간에 나갈 수 없도록 문을 통제한다. 나가려고 하면 못나가게 막는다. ㅋㅋㅋ

축하객들은 행사 끝날 때까지 건물 바깥에서 기다려야 한다. 대기소 따윈 없다. 그냥, 밖에서, 알아서, 기다려야 한다.

축하객들이니 1천 명 보다 당연히 훨씬 많다. 시장판이 따로 없다.

1,165명 전부가 줄줄이 나와서 한 명 한 명 호명을 하고 졸업장을 받는다. 한 명 당 10초씩 잡아도 3시간 14분이다.

12시에 끝난다는 행사는 1시에 끝났다.

12시에 끝날 예정이었으니 식사도 제공하지 않는다. 행사 시작 전 빵 하나 음료수 하나 준 게 전부다. 빵과 음료수도 점심이 아니라 오전 7시에 소집했으니 나눠 준 거다.

 

여기서 끝이면 어메이징이라고 하긴 소소하다.

유튜브, 틱톡에 올릴 영상을 찍는다고 40분을 더 붙잡았다.

굶겨 가면서. 그냥 굶긴 것도 아니고, 못나가게 가두고 굶겨 가면서. ㅋㅋㅋㅋㅋㅋ

 

참 애쓴다 애써...

 

 

빡쳐서 싸늘한 졸업생들

40분 만에 끝난 것도 졸업생들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져서였다.

 

행사장 나선 졸업생들은 거의 대부분 직장인이다. 40대도 보인다. 다들 허기지고 진이 빠진 기색이다.

표정이 밝기는 한데, 졸업이 기쁘다기 보다는 엿같은 행사 드디어 끝나서 후련해 하는 거 같다.

지금껏 밖에서 기다렸던 부모나 부인, 아이들도 허기지고 지쳐 보인다.

어디 아무데나 가서 밥부터 먹자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공무원이 일반 국민보다 위에 있다고 인식하는 권위주의 사회인 인니답게, 학교라는 권력자가 학생을 아랫사람으로 부리는 횡포로 보인다.

학생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니 저런 행태를 보이는 거다.

뭐 그리 대단한 치적이라고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지랄을 하는지.

인니의 사회나 경제 발전도가 한국에 비해 10~20년 정도 차이가 난다면, 권위주의나 관료주의 같은 구시대 잔재는 40~50년 차이가 나는 거 같다.

 

한국 사람이라면 그깟 졸업장 종이조가리 받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이해가 안갈 수도 있겠다.

인니는 전자 문서 활용 수준이 이제 갓 시작한 정도다. 최근에야 가족관계 증명서를 QR-Code가 찍힌 프린트물로 발급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프린트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프린트물을 원본처럼 자알 보관해야 하고, 혹시 분실하면 관공서 가서 복잡하게 신고하고 다시 프린트 받아야 한다. 그냥 수기로 적힌 가족관계 증명서를 프린트 문서로 대체했다는 정도의 의미 밖에 없다. ㅋㅋㅋ)

거의 모든 관공서, 준관공서는 서명과 도장이 찍힌 원본을 발급한다.

졸업장 역시 원본 발급 받은 걸 집에 잘 모셔두고, 취업 같이 필요한 경우에 복사본을 제출해야 한다.

혹시 분실하면 재발급 받는 것도 절차가 복잡하고,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그나마 대학교니까 재발급이라도 가능한 거다.

최근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천년대 이전 초중고 경우엔 서류 행정이 엉망이라 졸업장 잃어버리면 재발급도 못받는 경우도 흔했다. 그 학교 다녔고 졸업했다는 관련 서류를 찾기도 어렵고, 불법으로 졸업장 발급해주는 비리 때문에 교장 재량으로 간단히 해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책임자라도 책임지는 건 극도로 싫어하는 습성 탓이겠지만)

실제로, 내 여친도 본가에 둔 자기 고등학교 졸업장 없어진 거 같다는 모친 얘기를 듣고, 그야말로 펑펑펑펑펑펑 울더라. (다행히 찾았다.)

한국은 70~80년대 수기로 문서 관리하던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던 거 보면, 단순히 나라 발전도의 문제가 아닌 거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졸업식 행사를 8시간 동안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예전에 나 BIPA 어학 과정 수료식은 정말 많이 봐준(?) 거였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외국인들 현지식으로 했다가는 쌍욕을 먹을까봐 양보한 건가 싶다.

역시 사나워야 함부로 못하는 법이다.